아름다운 사람들이 갖는 직업을 이야기할 때 흔히 영화배우가 거론된다. 영화가 태동해 대중예술로의 지위를 확고히 한 이래 빼어난 미남미녀가 줄곧 영화계에 진출한 영향이겠다. 인간의 삶과 행위를 재현하는 배우란 업이 어디 미모만을 중시하겠느냐만, 탁월한 외모가 배우의 주요한 요건이 되고는 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외양은 훌륭하나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에 대한 거부감과 또 그 반대에 대한 하소연을 영화계 안팎에서 흔히 마주하게 된다. 특히 남다른 외모를 가진 배우에게 그 외모야말로 연기활동의 주된 장애물이 되고는 한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압도적 외모를 가진 배우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이만이 연기력 논란을 극복한다. 이 시대 최고 배우 반열에 올라 있는 탐 크루즈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브래드 피트가 모두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단박에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미남으로 당대의 스타가 되었으나 이어진 연기 경력으로 제게 주어진 모든 편견을 단박에 박살냈다.
그러나 모두가 이들과 같은 길을 걸은 건 아니다. 한순간 일대의 주목을 받았으나 외양을 빼면 별 볼 일이 없더라는 날 선 평가에 주저앉은 이들도 여럿이다. 당대 미남미녀란 평가에도 대표작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 몇 없는 배우가 한국만 해도 적잖다. 배우와 스타 사이의 미묘하지만 분명한 경계선을 뛰어넘은 소수의 이들이 더욱 대단해 보이는 이유다.
▲포제션스틸컷
찬란
당대 최고 미녀가 배우로 거듭나기까지
이자벨 아자니는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를 꼽을 때 빠지는 법이 없는 배우다. 1955년생으로 올해로 칠순이 된 이 배우는 지난 세기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 년간 절정의 미모를 과시하며 전 세계 영화판에 제 존재감을 새겼다.
할리우드가 아닌 프랑스 영화계에서 주로 활약한 배우임에도 한국에 널리 알려졌는데, <까미유 끌로델> <여왕 마고> 두 편의 작품은 영화 깨나 본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명작으로 남았다. 특히 <까미유 끌로델>에선 조각가 로댕의 연인이자 제자를 넘어 제 작품세계에 몰두한 재능 있는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훌륭히 표현해 여성주의 영화의 걸작으로 기록됐다.
이자벨 아자니는 당대 최고 미녀로 즐겨 언급되는 여러 배우 가운데서도 단연 특별한 위상을 지녔다. 뒷 세대 프랑스 대표 미녀인 소피 마르소 등과 극명히 대비된다. 미녀이면서도 배우로서 그 역량을 의심하는 이가 없다. <까미유 끌로델>의 열정적인 예술가 까미유 끌로델은 이전까지 거의 조명된 바 없는 여성 예술가의 예술혼을 선명히 드러낸 흔치 않은 작품으로 남았다. <여왕 마고>는 또 어떠한가. 서구 기독교사에서 손꼽는 비극인 '성 바르톨로메우 축일의 학살' 가운데 파란만장한 삶을 산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왕비를 인상적으로 연기했다. 이 작품들에서 그녀가 연기한 역할은 다른 평범한 배우라면 쉽게 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자벨 아자니는 그렇게 제 위상을 공고히 했다.
▲포제션스틸컷
찬란
<박쥐> 김옥빈의 모델이 된 캐릭터
최근 한국에 선보인 <포제션>도 이자벨 아자니의 대표작 중 한 편으로 꼽힌다. <포제션>은 한국 영화팬들 사이에서 특별한 위상이 있는데, 그는 박찬욱과도 관련이 있다. 박찬욱이 제 역작인 <박쥐>를 만들 당시, 주연인 김옥빈에게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로 이 영화를 권해서다. <박쥐>에서 김옥빈이 연기한 태주는 한국 영화사에서 비슷한 모양을 찾을 수 없는 독보적 캐릭터인데, 그 원형이 바로 이 영화 속 안나다.
박찬욱이 <포제션>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 또한 영화팬들 사이에선 유명한 이야기다. 1981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이 영화가 거의 반 세기 가까이 지나 한국에서 첫 개봉을 하게 된 데는 신작 <어쩔수가없다>로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박찬욱과의 관계성이 영향을 미쳤을 테다.
<포제션>의 감독은 폴란드 출신의 감독 안제이 주와프스키다. 한국에는 안드레이 줄랍스키로 오랫동안 알려졌던 이로, <포제션> 외에도 <퍼블릭 우먼> <샤만카> 등 성적이며 파괴적인 소재를 난해하게 표현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가장 성공한 작품은 역시 <포제션>인데, 주연인 이자벨 아자니가 이 영화로 제34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안제이 바이다 이후 세계적 작가가 등장하지 않던 폴란드 영화계의 주목받는 신성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포제션스틸컷
찬란
아내의 외도 뒤쫓는 남편
영화는 한 부부의 불화로부터 출발한다. 오랫동안 가정을 떠나 있던 남자 마크(샘 닐 분)가 집으로 돌아오는 게 영화의 시작이다. 아내 안나(이자벨 아자니 분)와의 사이에 어린 아들 하나를 둔 마크는 그간 전쟁터를 오가며 첩보원으로 활약해 왔다. 이제야 가정으로 돌아온 그이지만, 아내는 돌연 서로 갈라설 것을 요구한다. 오래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으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마크다. 다른 여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랏일을 한 것 아닌가. 그는 아내가 변심한 이유가 다른 남자가 있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한다.
마크는 사립탐정을 고용해 아내의 뒤를 캔다. 그로부터 알게 된 사실들은 마크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내에겐 오래 사귄 남자가 있는 것이다. 처음엔 가정에 소홀한 제 책임을 인정하는 듯했던 마크다. 그는 그녀에게 제 집을 내어주고 아들과 지내도록 허락한다. 그러고는 제가 나가 살며 가끔 집 안을 들러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들른 집에선 아들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절한 모습으로 홀로 남겨져 있다. 잠깐 나갔다 온다던 안나는 벌써 며칠째 집을 비웠고 어린 아들 홀로 집 안에 남긴 음식물을 뒤져 겨우 연명하고 있던 것. 눈이 뒤집어진 마크가 분개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포제션>은 통상적인 부부의 갈등과 결별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점차 공포와 고어, 심리 스릴러의 장르가 뒤섞인 독특한 작품으로 이끌어나간다. 단순한 외도와 변심처럼 보였던 아내의 행동 뒤에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 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마크의 주변에도 좀처럼 자연스럽지 않은 사건이 이어지는데, 이자벨 아자니가 1인2역을 했을 만큼 아내와 꼭 닮아 있는 어린이집 교사가 마크와 인연을 맺는다. 이성적인 해석으론 좀처럼 답을 내리기 어려운 관계와 사건이 지속되고 안나의 이상행동과 이에 다가서는 마크의 접근이 관객으로 하여금 결코 간단치 않은 긴장을 빚어낸다.
▲포제션포스터찬란
괴랄한 괴작으로부터 얻을 것이 있다면
사랑과 집착, 불륜과 폭력, 급기야 살인과 범죄로 이어지는 <포제션>은 안제이 주와프스키 특유의 광기 어린 작품이다. 광기가 무엇인가. 일반적 이해로는 좀처럼 닿지 않는 사고와 행위를 총체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영화 속 안나, 곧 이자벨 아자니가 연기한 여인의 행위는 극 중 인물들은 물론이고 영화 밖 관객에게도 공감을 사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연기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만큼 당대 평자와 관객을 납득케 했다. 공감이 아닌 인정을 이끌어낸 광기의 연기, 결코 쉽지 않았을 성취를 이 영화와 이자벨 아자니가 해낸 것이다.
혹자는 안제이 주와프스키가 훗날 거듭 맞닥뜨리는 연출과 연기의 과잉된 표현을 지적하기도 한다. 마땅한 일일 수 있다. 이해도 납득도 공감도 도외시한 자극적 표현이 대중 일반에게 그 의미를 발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기가 우리가 사는 시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처음 얼핏 영화 속 안나에게만 가해지는 광기란 표현은 이야기를 찬찬히 뜯어볼수록 또 다른 이에게 가서 닿게 된다. 가정을 도외시한 채 먼 전쟁터를 전전한 마크, 그를 그런 삶으로 이끈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는 국가와 위정자들이 안나보다도 더욱 미쳐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제목인 '포제션(possession)'은 말 그대로 소유물이나 소지품을 뜻한다. 영화 속 안나를 마크는 꼭 그와 같이 여긴 것은 아닐까. 제 소유인 아내가 제가 아닌 다른 이의 품에 들었음을 알았을 때 그는 분개한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유대며 관계가 하나하나 망가지기 시작했을 때는 알아채지도 못했으면서.
영화가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했단 사실은 자못 인상적이다. 당시 배우이자 폴란드에선 미녀로 꽤 유명했다는 아내 마우고자타 브라우넥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느낀 괴랄한 감정들을 영화 속에 녹여냈다. 단순한 외도를 넘어 괴물에게 홀려 광기에 전염되어 가는 여성상, 또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 계기를 제공한 남성상이 영화 속에 녹아든 건 그러한 영향이라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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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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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떠나 있던 남자가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들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