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전쟁2' 포스터(주)다큐스토리 프로덕션
이러다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악질 친일파 김창룡이 주인공인 영화가 제작될지도 모르겠다. 지난 9월 10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2> 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제주 4.3 항쟁(아래 4.3) 당시 민간인 집단 학살을 주도한 9연대장 박진경 대령(이하 계급 생략)의 사진을 버젓이 내걸고 있어서다.
오해할까 싶어 전제해 둔다. 이 글은 후기가 아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상영관이 전국적으로 몇 곳 안 되기 때문이다. 10일 현재 상영하고 있는 곳은 서울과 경기, 대구와 부산의 몇몇 영화관이 전부다. 영화진흥위원회는 '특정 관점의 강조로 인한 편향된 표현 방식과 완성도가 아쉽다'며 독립 영화 불인정 결정 통보를 내렸다.
역사 교사로서 봐야 한다는 당위와 함께 굳이 봐야 하나 싶은 양가적 감정도 든다. 2024년에 전편이랄 수 있는 영화 <건국전쟁>을 관람한 뒤 눈과 귀를 씻었던 터다. 역사 왜곡 수준의 짜깁기가 만연한 수준 미달의 내용이라 당시 117만 명이라는 관람객 숫자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양극화를 절감한 계기였다.
박진경이 누구인가. 무장 세력을 토벌하기 전에 선무 공작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김익렬이 미군정에 의해 전격 해임된 뒤 후임으로 발탁된 자다. 곧, 강경 토벌의 임무를 부여받고 제주도로 건너온 셈이다. 당시 소련과의 체제 경쟁과 공산주의 세력의 급속한 확산 속에 제주도의 '반란'을 서둘러 잠재워야 한다는 미군정의 초조함을 보여주는 인사였다.
그의 부임은 이른바 '제주도 초토화 작전'의 시발점이라고 여겨진다. 5.10 총선거에서 제주도 내 세 곳의 선거구 중 두 곳이 무효화한 직후여서 토벌은 더욱 강경해졌다. 그의 연대장 재임 기간에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제주도민 5000여 명이 공산주의자 또는 부역자라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학살되었다.
그의 강경 토벌 방침에 부대 내 탈영자가 속출했다. 탈영 규모가 워낙 컸던 까닭에 9연대가 해체되고 남은 병력은 11연대로 통합되었다.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자 그를 제거하려는 부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모의가 있었고, 그의 공을 높이 산 미군정의 대령 진급 축하연이 있었던 날 밤 암살됐다. 부임한 지 고작 43일째 되는 날이었다.
문상길과 손순호 등 그의 암살을 모의하고 실행한 4명의 부하는 군법 재판을 거쳐 모두 총살됐다. 그들은 분단을 획책하고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트린 미군정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주모자 문상길은 동료 군인들을 향해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에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민족을 학살하는 군대가 되지 말라'는 최후 진술을 남겼다.
제주 4.3, 대통령까지 공식 사과했는데...
대한민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4.3은 해방 후 미군정의 실정과 만행,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대규모 민중 봉기다. 토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적게는 2만 5000명에서 많게는 5만 명까지 추산되고 있다. 당시 제주도의 인구가 20여만 명이었으니, 그 피해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연이어 10.19 여순사건과 6.25 전쟁이 터지고 남북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4.3은 함부로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사건이 됐다. 가족 중에 당시 학살된 이가 있다면, 예외 없이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반세기가 넘도록 정부는 지웠고, 유족들은 숨겼다. 당시의 참상을 증언할 유족들마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며 참혹했던 4.3의 역사는 시나브로 잊혀갔다.
2000년이 되어서야 '제주 4.3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4.3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동안 유족들이 피눈물을 삼키며 견뎌내야 했을 고통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4.3 특별법은 해방 직후 좌우의 이념 대립 속에 희생된 이들을 위한 '진혼곡'이며, 진상규명을 통한 과거사 청산과 화해를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영화 <건국전쟁2>는 4.3 특별법의 취지를 부정하며 한 맺힌 유족들의 삶을 되레 조롱하고 있다. 4.3을 '공산주의 폭동'으로 단정하는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 부정당했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유족들 앞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라며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했다.
더욱이 미군정의 '고분고분한 수족'이었던 박진경을 영웅시하며 '얼굴'로 내세운 건, 4.3을 넘어 대한민국 현대사 전체를 전면 부정하는 망국적 도발이다. 무장대 토벌 명령을 하달받은 박진경이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됐다는 사실 하나에 매몰되어 전후 맥락을 모두 소거해선 곤란하다. 그렇듯 납작한 해석은 준엄한 역사를 희화화하고 왜곡과 폄훼를 일상화한다.
미군정의 안달은 당시 조병옥 경무국장에 의해 '제주도는 빨갱이의 섬'이라는 규정으로 이어졌고, 토벌대에 의해 민간인 집단 학살이 자행되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앞장선 자들이 박진경과 같은 일본군 출신의 군인들이었다. 특히 박진경은 오사카 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한 '엘리트'로, 일제뿐만 아니라 미군정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박진경을 추앙하는 건, 미군정의 폭력적 4.3 진압을 옹호한다는 의미다. 당시 미군정이 하달한 진압 작전명은 'Red Hunt'였다. 토벌대의 제주도민 학살을 '빨갱이 사냥'으로 규정한 셈이다. 넉 달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 정부의 토벌 양상은 더욱 강경해졌고, 4.3 전체 시기를 통틀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전공한 학자들은 이구동성 이렇게 말한다. 해방과 전쟁, 분단의 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은 '빨갱이'여서 학살된 게 아니라 죽임을 당하고 나서 '빨갱이'로 낙인찍혔다는 것. 4.3의 주동 세력이 남로당 제주도당이라고 해서 제주도민 모두가 '빨갱이'일 리도 없을뿐더러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할 논리가 될 수도 없다.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의힘 소속 청년 당원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한 장동혁 대표의 소감이다. 언뜻 '공자님 말씀'처럼 들리지만, 여론을 호도하는 무책임한 '헛소리'다. 영화 <건국전쟁2>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 사료를 제 입맛대로 '취사선택'하는 건 반역사적 범죄 행위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불인정 결정은) 헌법상 금지되는 사전 검열이다. 사상과 표현을 정부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나라, 자유가 숨 쉬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건국 이념이다."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한술 더 떴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어서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그가 주군으로 모셨던 윤석열과 김건희 부부를 희화화한 만화를 그렸다고 고등학생에게 뭇매를 가한 때가 엊그제다.
이념적, 정치적 양극화라는 현실 뒤에 숨어 이런 영화를 우격다짐으로 영화관에 내걸고 '자유 우파' 세력을 향해 호객 행위를 일삼는 작태를 멈춰야 한다. 감독이 주장을 펼칠 곳은 보수 언론과 유튜브가 아니라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공론의 장이어야 한다. 4.3의 역사가 왜곡됐다고 확신한다면,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역사학자들과 끝장 토론을 벌여보라.
국민의힘 역시 금도를 넘어서고 있다. 기존의 '내란 세력'이라는 벼슬에 '역사 왜곡 집단'이라는 감투까지 쓰게 될 판이다. 영화 <건국전쟁2>의 내용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현행 초중고 교과서는 모두 거짓투성이라는 뜻일 테다. 박진경을 건국 영웅인 양 미화하여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엄혹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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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