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한때 이동통신 시장에서 업계 최강자를 넘봤던 업체가 있다. 바로 블랙베리 리미티드. 시가총액이 한화로 2조 3000억 원에 이르고, 2009년 미국 스마트폰 시장 과반을 넘어섰던 이 업체가 마침내 스마트폰 사업을 중단한 게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기업이었고, 노키아와 함께 충성도 높은 고객층을 보유한 강자였던 이들을 이제는 기억하는 이조차 그리 많지가 않다.
블랙베리만이 아니다. 비슷한 사례가 숱하게 많다. 이동통신에서는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고, 필름카메라에선 코닥이, 한때 컴퓨터게임 시장을 주도한 EA라거나 일본의 코에이 같은 회사도 얼마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다. 영화계에선 21세기 초반, 영화산업의 중심에 있었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침체가 현재진행형이다. 과거로 눈을 돌리면 한때 액션과 무협에서만큼은 할리우드에 밀리지 않는다 했던 홍콩영화계 또한 완전히 몰락하여 그 영광을 찾아볼 길 없다.
자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OTT 서비스 최강자 넷플릭스는 침체된 한국 영화산업의 기회라고까지 여겨졌다. 전 세계 각지의 콘텐츠가 대중의 안방으로 곧바로 침입하여 한국 영화계의 생태계를 훼손하리란 우려는 기우일 뿐이었다. 그 반대로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 한류를 주도하고 한국 콘텐츠의 위상을 높였다. 넷플릭스 시청수 및 시청시간 최상단에 위치한 <오징어 게임> 시리즈를 비롯, 한국에서 제작된 드라마와 영화가 전 세계에서 크게 흥행하는 사례가 줄을 이었다.
▲황야스틸컷
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흥행작 돌아보니
1000만 관객은 극장산업이 위축된 한국의 현실에서 다시 보기 힘든 기록이다. 그러나 OTT, 그것도 넷플릭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껏 넷플릭스에 공개된 한국영화 가운데 누적 시청수 1000만 회를 넘는 작품이 무려 16편에 이른다. 역대 1위인 <황야>는 무려 4100만 회를 돌파했다. 전 세계 넷플릭스 영화 시청수 1위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3억 2000만 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4100만 명에게 가서 닿은 작품이라면 그 영향력이 결코 작았다곤 할 수 없으리라.
누적 시청수 2000만 회를 넘긴 작품들을 하나하나 언급해 본다. <황야>부터 <#살아있다> <발레리나> <무도실무관> <카터> <길복순> <정이> <승리호> <전,란>까지가 2000만 회를 넘겨 역대 한국 영화콘텐츠 시청 상위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자, 공통점이 보일 것이다. 하나하나가 영화팬들 사이에서 졸작, 잘 봐주어도 범작이라 불리는 작품군이다. 흥행작이라 하여 꼭 작품성 있는 영화라 평가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극장 천만영화 목록과 비교해도 그 무게감이 극명하게 차이를 보일 정도다.
한국에서 비교적 대중 만족도를 잘 반영한다고 하는 왓챠피디아, 또 전 세계 영화 데이터베이스인 iMDB 평점을 보아도 이 같은 경향이 명백하다. 한국영화 역대 박스오피스 흥행 상위 9개 작품과 위 넷플릭스 누적 시청수 상위 9개 영화의 왓챠피디아와 iMDB 평점을 구해 비교해보았다. 각 수만 명씩 별점을 준 가운데, 극장 상영작 최고점은 4.2와 8.1(앞 왓챠피디아 5점 만점, 뒤 iMDB 10점 만점), 최저점은 3.7과 6.8을 기록했다.
▲길복순스틸컷
넷플릭스
일관된 질적 저하, 이대로 괜찮을까
반면 넷플릭스 영화의 경우 최고점이 3.0과 6.9, 최저점은 1.7과 5.1에 불과하다. 평균 또한 마찬가지다. 극장 영화는 각 3.9와 7.3, 넷플릭스 영화는 2.4와 6.2다. 각 플랫폼 중위값을 고려하면 극장영화는 평균 이상, 넷플릭스는 평균을 크게 하회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누적 시청수 2000만 이상의 인기작만 추린 것이 그러하다. 그 아래 작품 면면을 살피다가 차마 민망하여 더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요컨대 요 근래 수년간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되어온 작품의 질이 심각할 정도로 저하돼 있다. 이 같은 경향이 할리우드를 비롯한 해외 영화계에서도 없지 않아 넷플릭스 영화는 뇌를 비우고 시간을 때우는 용도로 본다는 자조적 이야기가 공공연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조일 뿐이다. 영화를 보며 졸작이길 기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꾸준히 제작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영화가 사실상 해외 영화사에 의해 현지 배급되는 작품 혹은 그 이상으로 파급력이 있다는 점에 있다. 이들 영화가 거듭 해외 대중들에게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각인시킨다면 한국영화가 갖는 이미지가 크게 왜곡되고 저하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실상 그 이미지를 만든 것이 한국영화란 점에서 그를 왜곡이라 적고 있는 스스로가 민망하긴 하지만 말이다.
경향은 뚜렷하고 분명하다. 그럼에도 넷플릭스 배급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에 대해 그 경향을 분석하고 이유를 파고드는 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계 비평과 언론이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면, 이미 담론이 형성돼 있어야 마땅할 주제가 아닌가 말이다. 개별 영화평을 중심으로 하는 '씨네만세'에서 기존 양식을 벗어나 특별히 이 사안을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마귀스틸컷
넷플릭스
고민 없이 되풀이되는 실패... 이유는?
최근 <길복순>에 이어 그 스핀오프인 <사마귀>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또 한 번 공개됐다. 전도연, 설경구, 황정민 등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을 출연시켜 화제를 모았던 이 시리즈가 같은 세계관 아래 주인공을 바꾸어 이번엔 임시완과 박규영을 중심으로 한 작품으로 새로이 제작됐다. 출연진 세대교체와 함께, 감독도 변성현에서 이제 첫 장편을 찍는 이태성으로 바꾸었다. 변성현은 그래도 <나의 PS 파트너>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감독하며 그 자질이 검증된 중견 감독이었다.
영화의 완성도는 예상처럼 심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움이 없었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평이하게 흘러가는 동안 승부수랄 것을 하나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다. 전작에서 그나마 존재감을 보인 배우진조차 턱없이 경량화 돼 차이만 두드러질 뿐이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곤 하지만, 연기 측면에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박규영은 그 분량을 채우는 데만도 급급하다. 허술한 각본, 심지어 매력 없는 세계관이 구태여 스핀오프로 두 편에 걸쳐 나와야 했는지를 고민케 한다.
그러나 산업적 관점에서는 전혀 달랐으리란 것을 안다. 영화는 그 성공이 예견돼 있다. 전작이라 할 수 있는 <길복순>부터가 대단한 성공작이다. 넷플릭스 한국 영화 역사상 시청수 6위에 올라 있을 정도다. 누적뷰수가 2700만 회를 훌쩍 넘어섰다. 전도연과 설경구, 황정민의 존재 또한 그만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뜻이다. 성공작의 스핀오프는 그만한 흥행을 기대케 한다. 그렇다면 왜 만들지 않는다는 말인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포스터넷플릭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변화가 필요한 이유
글 서두에서 혁신을 도모하고 내실을 기하는 걸 미루다 마침내 파국을 맞은 사례를 언급했다. 브랜드 이미지를 믿고 대동소이하고 심지어 경쟁력 없는 결과물만 생산하다 어느 순간 충성고객까지 외면한 경우가 수두룩하다. 넷플릭스 한국영화가 그와 같은 결말을 맞지 말란 법이 없다. 이미 넷플릭스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가 심각하다. 앞서 비교했듯 데이터량이 적게는 수만, 많게는 수십만에 이르는 플랫폼 평점에서도 그 경향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같은 방식을 거듭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넷플릭스에선 전 세계의 작품이 경합하며, 넷플릭스의 정책변화에 따라 점점 더 다양한 국가, 다채로운 배경의 콘텐츠가 모여든다. 어느 순간 외면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국 영화는 그저 시간 죽이기 용이라고, 서사에 대한 고민도, 철학과 사상의 반영이며, 예술적 도모도 없는 작품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이미 그렇게 보아도 무방한 작품이 많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큰 위기, 절체절명의 순간일지 모른다. 반전을 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주듯,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또 한국 영화와 감독, 배우에 대한 호감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넷플릭스가 그 관심이 가장 먼저 해외 대중들과 맞닿는 장이 되리란 건 분명하다. 이들 작품이 꾸준히 해외에서 시청되고 있단 사실이 그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게 명확하지 않은가. 어차피 넷플릭스용이라고, '와꾸(틀, 외연을 속되게 이르는 말)만 갖추면 넷플릭스 투자는 받아낼 수 있다고' 여기는 일을 이제는 멈춰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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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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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부터 '사마귀'까지... 넷플릭스 한국 영화의 심각한 문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