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사무실 책상처럼 증거 서류들이 쌓여 있다.
이남주
극의 제목인 '프리마 파시(Prima Facie)'는 '겉보기에는', '처음에 진실로 여겨지는'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법률에서는 '증거가 불확실해 강력한 반증이 없으면 이대로 승소할 사건'을 일컫는 용어로 쓰인다. 극의 구성은 '프리마 파시'라는 제목처럼, 사건의 '겉'에서 시작해 점차 사건의 이면으로 들어간다.
극중 유일한 화자인 테사는 사건의 당사자인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닌, 변호인이다. 유능한 변호사인 테사는 '법'의 관점으로 증인심문을 한다. 증인은 모르는 법정의 룰을 이용해 실언을 이끌어낸다. 테사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룰에 기대 피해 여성에게 입증 책임을 넘기고, 판사와 배심원단을 휘어잡아 승소를 한다. 법의 언어에 따라 정당하게 승소를 쟁취했다고 생각했지만, 극이 진행되며 피해자 된 테사는 자신이 진행했던 심문 과정이 부당했다는 걸 깨닫는다.
테사가 피해자가 된 후 제출해야 하는 증거는 테사 그 자체와 밀접하게 얽힌다. 절도, 폭행과 같은 타 범죄에서 CCTV나 목격담 같은 외부의 증거가 피해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과 다르다. 성폭행 사건은 테사의 몸에서 가해자의 DNA가 검출되는지, 테사의 기억이 일관되고 명확한지를 두고 피해 여부를 재단한다. 맨정신으로 무대 위의 폭행 장면을 목격한 관객조차 사건 당일 쥴리안이 두 손으로 테사를 겁박했는지, 어느 쪽 손으로 테사를 짓눌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법은 테사에게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테사의 불분명한 기억과, 스스로 피해 사실을 부정하면서 몸에서 지워낸 증거들은 가해자 승소의 가능성을 높인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관계였다는 점이 언제든 성관계를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은 법정에서 통하기 힘들다. 게다가 가해자 쥴리안은 테사가 그랬듯이, '유능하고', '촉망받는' 변호사다. 테사는 이러한 사실들이 쥴리안의 감형 사유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건 현장 자체가 돼버려 샅샅이 조사당하는 테사에게 '분명하게, 일관되게 기억해 내라'며 입증 책임을 넘기는 법의 언어는 피해자가 겪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무대는 테사가 변호사로서, 피해자로서 누비는 법정을 재연했으며, 관객석은 법정을 빙 둘러 배치된다. 관객은 배심원석에 앉은 듯 테사의 진술을 듣는다. 극 초반 변호사로서 테사의 증인심문, 극 후반 피해자로서 증인석에서 하는 진술은 동일한 무대 세팅에서 이뤄지지만 전혀 다른 관점의 대사로 인해 대조된다. 피해자가 된 테사는 법의 언어로 이 사건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느낀다. 패소를 직감한 테사는 삶의 언어로 진술을 시작한다.
테사는 이 사건을 통해 삶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진술하면서, '앞으로 잃을 것들'을 이유로 가해자는 감형이 될 것이라는 법의 모순을 얘기한다. 누구보다 법을 믿고 따르던 테사는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 여성이 겪는 법의 부당함을 깨닫는다. 법의 모순을 지적하는 테사의 발언에 판사는 '브와 디르'를 선언한다. '브와 디르'는 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증언이 배심원단에게 편향, 선입견을 불러올 경우를 대비해 배심원이 듣지 못하게 퇴장시키는 제도다. 브와 디르 후 조명은 관객석을 비추고, 관객은 판단해야 한다. 그동안 관객이 목격한 진실은 '법'의 체계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이야기를 봐야 하는 이유
▲연기가 펼쳐지는 원형 무대를 두르고 관객석이 가깝게 위치해있다.
이남주
19년 호주 초연 당시, 관객들 중 몇몇은 수지 밀러에게 '이 상황이 강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코멘트를 남겼다고 한다. 연극은 좋았지만, 이게 정말 성폭행인지 모르겠다는 악의 없는 질문이었다. 피해자가 성관계 거부 의사를 표현하긴 했지만 성폭행이라고 할 만큼의 폭행·협박이 있었는지 애매하다고 느낀 관객들이었다. 여성의 목소리가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에, 수지 밀러의 의도와는 다르게 논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의의 문제'를 다뤄보고 싶었다는 수지 밀러의 말처럼, <프리마 파시>는 답이 아닌 문제를 던지며 끝난다. 재판 결과는 알 수 없으며, 극이 끝나면 관객은 그동안 법이 제시했던 남성의 관점의 답이 아닌, (한국에서는) 아직 법이 닿지 못한 관점에서의 새로운 답을 찾아야 한다.
극 후반부로 갈수록 관객석 곳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든지, 계속 '동의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고, 그 논의에 여성의 목소리가 활발하게 반영된다면 좋지 않을까. 변호사이자, 성폭행 피해 여성인 테사의 용기 있는 진술이 담긴 <프리마 파시>는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에서 내달 2일까지 상연한다.
▲8월 27일부터 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상연된다.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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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가해자 변호하던 이의 절규, 그가 세상에 한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