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 속에서 태어나 예술적 자유를 좇아 유럽을 떠돌던 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였다. 그가 남긴 영화들은 모두 파격과 실험, 그리고 광기로 점철되어 있다. 줄랍스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1981년작 <포제션>은 그런 그의 세계관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물이다.
이 영화에는 프랑스 국민 배우 이자벨 아자니와 젊은 시절의 샘 닐이 출연했다. 둘 다 훗날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촬영이었다"라고 회상할 만큼, 단순한 공포영화나 심리극이 아니다. 사랑의 붕괴와 인간의 광기, 그리고 존재의 정체성까지 뒤섞어 놓은, 일종의 악몽 같은 예술 실험이다.
1980년대 초 서베를린이라는 분단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포제션>은, 첩보원 남편 마크와 그의 아내 안나가 서서히 서로를 파괴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 초반, 안나는 이유도 모른 채 이혼을 요구하고 마크는 점점 무너진다. 부부는 서로를 원망하고 욕망하며 동시에 증오한다. 그리고 그 파국의 끝에서 우리는 인간적 설명이 불가능한 '무언가'를 목격한다.
안나의 불안과 절망은 단순한 불륜이나 가정의 문제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와 사회, 인간 본성의 균열을 드러내는 징후다. 줄랍스키는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가진 '분단의 상처'를 인간의 내면으로 끌고 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소유하려는 두 인간의 파괴적 욕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44년 만의 재개봉이다.
이혼, 빙의, 그리고 '촉수 괴물'
▲영화 <포제션>의 한 장면.
찬란
<포제션>의 중심에는 이자벨 아자니가 연기한 '안나'가 있다. 그녀는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흔들리고 울부짖고 무너진다. 안나는 스스로를 악마라고 말하고,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채 광란의 상태로 빠져든다. 지하철 역에서 흰색 원피스를 입고 피투성이로 몸부림치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이 장면 하나로 그녀는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포제션>이 단순히 광기를 연기하는 영화라면 전설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절정에서 등장하는 '촉수 괴물'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다. 그런데 그 존재는 혐오스러우면서도 묘하게 관능적이다. 그것이 인간의 형태를 닮아가며 완성되어가는 모습은 사랑과 욕망, 그리고 파괴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줄랍스키는 이 괴물을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닌, 안나의 욕망과 해방의 화신으로 제시한다. 그녀는 남편 마크의 소유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와 결합하며 자신을 재창조한다. 하지만 자유가 아닌 또 다른 지옥을 낳는다. 괴물은 결국 인간의 사랑이 빚어낸 괴물, 즉 소유욕의 실체인 것이다.
<포제션>은 초자연적 요소를 빌려 부부 관계의 심리적 파국을 묘사한다. 줄랍스키가 공포와 사랑, 현실과 환상을 구분 없이 뒤섞는 순간, 관객은 불안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그 불안은 단지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너무나도 인간적인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냉전의 분단 도시, 사랑의 붕괴를 비추는 거울
▲영화 <포제션>의 한 장면.찬란
서베를린은 <포제션>의 배경이자 또 다른 주인공이다. 1961년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단순한 물리적 장벽이 아니라, 이념과 인간 관계의 단절을 상징했다. 줄랍스키는 베를린 장벽으로 부부의 관계를 은유한다. 마크와 안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하며 끊임없이 싸운다. 안나는 말한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야."
그녀는 억눌린 여성으로서, 한 개인으로서의 해방을 외친다. 하지만 그 외침은 자유의 선언이 아니라 광기의 비명에 가깝다. 줄랍스키는 냉전 시대의 인간이 겪는 존재적 고립과 분열을 시각화했다. 사랑이든 국가든, 소유하려는 욕망이 인간을 얼마나 쉽게 괴물로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포제션'은 두 가지 의미, 빙의와 소유를 동시에 품고 있다. 안나는 알 수 없는 악이 빙의한 듯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스스로 만들어낸 욕망의 그림자다. 마크 또한 아내를 소유하려는 집착에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을 잃고, 그 끝에서 탄생하는 건 괴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 은유, 심리적 공포, 초현실적 판타지가 뒤섞여 있는 독보적인 작품이다. 줄랍스키는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다. 설명하지 않고 감정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모든 걸 느끼게 만든다. 그 감각은 불쾌하고 혼란스럽지만 묘하게 중독적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 속 괴물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사람들
줄랍스키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미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제정신인가?" 냉전 시대의 분단 도시에서,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부부가 서로를 파괴해가는 모습은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이념과 권력, 체제와 욕망에 의해 찢겨나가는 인간의 초상이다.
<포제션>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봐도 매우 낯설고 불친절하다. 하지만 그 불친절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본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랑과 광기, 자유와 소유, 인간과 괴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관객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파괴적 이미지와 광기의 연기로 관객을 몰아붙인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안나와 마크는 결국 서로를 파괴함으로써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끝난다. 어쩌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포제션>은 그 불가능한 사랑의 끝에서 태어난 괴물 같은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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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요구하는 아내의 실체, 40년 전 영화의 불편한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