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바라보는 세상이 아이에게 닿지 않듯이, 아이들이 보는 풍경 또한 어른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차이라면 어른은 아이의 세계를 안다고 믿지만, 아이들은 그러지 않단 것이랄까.
<우리집>은 집, 즉 가정의 의미를 아이의 시선에서 돌아보는 영화다. 2016년 작 <우리들>로, 아이들의 성장서사를 인상적으로 그려낸 윤가은 감독이 3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이다. 독자적 시선을 갖춘 인물 고갈에 허덕여온 한국 영화계가 간만에 맞이한 수준급 감독으로, 전편에 이어 또 한 번 아이들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우리들>이 관계를 말했다면, 한 글자만 달라진 <우리집>은 집을 말한다. 물리적인 의미의 집일 수 있겠으나, 집이 그저 시멘트 벽돌과 지붕으로만 이루어진 건조물은 아닌 것이다. 그 안에 든 사람들, 사람들이 맺는 관계, 관계 안에 깃든 정이며 마음이 모여 우리가 집이라 부르는 총체를 이룬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집>에서 두 가정의 아이를 비춘다. 하나는 번듯한 집에 살지만 돌봄으로부턴 소외된 아이들이다. 또 하나는 부모의 사랑은 남부럽지 않아도 집이라 불리는 공간을 지탱하기 어려운 아이다. 그 모두가 한국사회에 실재하는 단면이란 점에서 <우리들>은 지극히 사실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집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정서학대, 방임... 한국 아동의 그늘
보건복지부 산하 아동권리보장원이 지난달 '2024년 아동학대 주요 통계'를 발표했다. 통계엔 한국 아동학대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표가 여럿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정서학대가 되겠다. 연간 1만 1466건, 아동학대 사례유형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직접적 폭력이 없는 정서학대다. 여러 유형의 괴롭힘을 포괄하는 정서학대엔 아이가 보고 있는 가운데 폭언과 폭력이 오가는 부부싸움을 하는 것이 포함된다. 정서학대에 이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학대 유형으로는 방임이 있다. 모두 1800건이 연간 방임으로 보고된 가운데, 통상 아동학대라 여겨지는 직접적 폭력 말고도 정서학대와 방임 등이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들>의 주인공 이하나(김나연 분)도 정서학대의 초입에 놓여 있다. 겉으로 보면 부모와 오빠, 하나까지 평범한 4인 가구지만 하나의 집은 늘 불안하기만 하다. 엄마와 아빠가 집에 함께 있기만 하면 싸움을 멈추지 않는 탓이다. 폭언과 욕설이 오가는 다툼은 아이들 앞에서도 끝나지를 않는다. 오빠는 아예 두터운 헤드폰을 쓰고 방 안으로 숨어든다. 하나는 어찌할 줄 모르는데, 무언가 제가 할 일이 있으리라 믿는 때문이다.
하나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하다. 초등학교 5학년, 이제 겨우 열한 살 어린 나이지만 요리 하나는 그럴 듯하게 한다. 맞벌이인 엄마가 집을 비우는 동안 하나가 끼니를 차린 것도 벌써 여러 번이다. 어찌할 수 없어 시작한 요리가 취미가 되고 특기가 되었다 해야 할까. 하나는 제가 밥을 차리면 엄마의 부담이 줄고, 그렇게 다시 평안함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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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장 보는 아이는 저와 같은 아이를 알아본다
여느 날처럼 하나가 홀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던 어느 날이다. 하나의 눈에 두 아이가 들어온다. 유미(김시아 분)와 유진(주예림 분) 자매로, 그 넓은 마트를 자매 둘이 활보하며 물건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의 눈엔 특별해보이지 않는 그 광경이 하나의 시선에선 자못 인상적이었던 듯. 아마도 어른 없이 장 보는 이가 이 마트, 나아가 이 동네에 오로지 이들 뿐이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로부터 영화는 하나가 유미와 유진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마침내 다가서 관계를 맺기까지를 뒤따른다.
유미와 유진은 하나와는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이 홀로 장을 보는 이유는 하나의 사정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가 가정불화로 고심하고 있다면, 유미와 유진은 돌봄공백에 놓여 있다. 건설현장을 전전하며 돈을 버는 엄마와 아빠는 일을 찾아 지방으로 간 지 한참이고, 이들 자매가 홀로 집에 남아 벌써 며칠 째 생활하고 있다고. 하나보다 몇 살이나 어린 이들 소녀가 제 삶을 책임진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언니 유미가 철없는 동생 유진을 챙기며 무탈히 며칠을 나고 있는 모양이다.
영화는 하나가 유미, 유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빚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나의 집에선 하나가 한때 가족의 가장 화목했던 순간을 재현하고자 함께 가족여행 떠나기를 추진하는 과정이 펼쳐지고, 유미와 유진은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고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것이다. 좀 더 나이가 많고 그나마 세상 물정을 아는 하나가 두 과제 모두에서 앞장서 총대를 메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녀 또한 아직은 어린애란 사실만이 부각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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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문제가 곧 아이의 문제가 된다
<우리들>은 순진한 아이들의 시각으로 이들이 제게 닥친 어려움에 맞서는 과정을 비춘다. 부모의 불화며, 내놓은 집에 새 세입자가 들어오는 일이 어디 어린 여자아이가 애쓴다고 바꿀 수 있는 일일까. 그러나 하나와 다른 두 아이는 어떻게든 그를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들이 맞서는 건 그저 부부싸움과 집이 없어지는 일만이 아니다. 이들은 제 삶에 당면한 가장 큰 문제,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들은 부부싸움이 아닌 정서적 학대에, 집의 상실이 아닌 돌봄과 유대의 상실에 맞선다.
아이들의 간절함은 그러나 어른들에겐 좀처럼 중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많은 경우 아예 없는 듯이 취급된다. 어른의 시선에선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어린 애가 뭘 알겠어. 어른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그런 편한 시각이 이들에게 자행되는 정서적 학대며 방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매년 발표되는 아동학대 주요 통계에서 가장 흔한 항목이라 해도 좋을 정서적 학대와 방임에 대하여 우리 시대 시민들은, 심지어 부모라 할지라도 관심과 상식이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아이들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개의치 않고 보이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돌봄의 공백 또한 가정마다 천차만별이다. <우리집>은 그와 같은 현실 가운데서 어른의 시각에 좀처럼 잡히지 않는 아이들의 상황을 현실감 있게 비춘다. 아이들이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응하는 모습으로부터, 그와 같은 일이 어른들의 개입으로 풀려나가야 함을 일깨운다.
▲우리집포스터롯데엔터테인먼트
당신의 아이들은 안녕한가요
하나가 겪는 문제는 가정의 불화다. 제 앞에서 빚어지는 정서적 학대다. 그는 부모의 이혼으로 마침내 끝이 난다. 하나가 생각한 방식, 즉 가족여행을 통한 화목함의 복원이 아니라도 정서적 학대가 종결되고 나름의 평온을 되찾는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로 새로운 형태의 가정이 화목함 아래 자리잡는 계기가 되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오늘의 문제가 해소되기는 한다.
그러나 유미와 유진의 사정은 그와는 좀 다르다. 부모의 재정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들 자매가 돌봄공백에 거듭 놓이리란 건 명백해 보인다.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고 이사 간 터전에서 이들이 맞이할 일상이 어떤 것인지를 관객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집>의 결말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또한 쉬이 속단할 수가 없다. 영화는 아이들의 세계가 어른들이 빚어놓은 세상에 터 잡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우리가 만든 세상이 온건하고 건전하지 못하다면 그 아래 자리한 아이들의 삶 또한 좋지 못한 것과 맞닥뜨릴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하나는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 화목한 집을 꿈꾼다. 유미와 유진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온 가족의 터전을 갖추지 못하여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집이 가정을 지탱해주기를 바란다. '우리집'이라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그 공간이 모든 아이에게 허락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 <우리집>의 메시지라 해도 틀리지 않을 테다. 오로지 아이들을 위하여 한국사회의 모든 우리집들이 무탈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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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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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학대 1만 건... 어른이 망쳐 놓은 아이들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