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제가 끝나고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 정신없이 곯아 떨어졌다. 휴게소에 도착했단 안내를 듣고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바로 그 순간 떠오른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두 검사>, 그 주인공인 젊은 검사의 모습이었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차 3등석 피로에 절어 있던 젊은이는 지방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검사였다. 그가 제 근무지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하게 된 건 오로지 저 자신의 판단이었다. 공산주의 체제 아래 엄혹한 소련에서 공직자가 근무지를 무단이탈하는 행위는 커다란 잘못이었다. 그저 무단이탈만도 아니었다. 그가 성과 없이 돌아간다면 곧장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저 위대한 스탈린 동지에게 지방의 뜻 있는 인물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으며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는 현실을 고발하고자 떠난 길이었다. 오래 공부한 번듯한 젊은이가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누추한 3등석 기차칸에 끼여 꾸벅꾸벅 조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두 검사>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10여 편의 작품 가운데 단연 첫 손가락에 꼽을 만한 영화다. 아그네츠카 홀란드가 찍어낸 최고수준의 전기영화 <프란츠 카프카>정도가 견줄 수가 있을까. 매년 걸작이라 부를 만한 영화의 목록에 단 한 편을 추가하기가 쉽지 않은데, 올해 부국제에선 다른 어디서도 마주할 수 없는 빛나는 작품을 여럿 만날 수가 있었으니 성공적인 걸음이었다.
▲두 검사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에 생소한 거장의 역작
<두 검사>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섹션에 초청된 작품이다. 아이콘에 들었단 뜻은 감독 세르게이 로즈니차가 부산이 주목하는 현존 영화계 거장으로 분류된다는 뜻이다. 사실 그리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아이콘 섹션 감독들에 비하여 한국에서의 인지도가 부족할 뿐, 깊이 있는 영화팬이라면 그의 이름을 수차례 들어보았을 테니 말이다. 1964년 구 소련 벨로루시에서 태어난 세르게이 로즈니차다. 1997년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영화학교(VGIK)를 졸업한 뒤 다큐와 극영화를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가 세상에 내어놓은 영화만 20여 편,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과 그와 얽힌 일련의 사태를 다룬 작품군은 그를 주목할 만한 명감독의 반열에 이끌었다. 칸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시선 감독상, 골든아이 다큐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 그리고 프랑수아 살레상 등을 수상했다. <두 검사>가 그중 마지막 것이다.
영화는 1937년, 스탈린 공포정치의 정점에 있던 소련의 변방 도시 황량한 교도소에서 시작한다. 말이 교도소지 이곳은 고문이 횡행하는 비인도적 공간이다. 요즈음에도 처벌받는 강력범죄자며 잡범들도 있겠으나, 상당한 수를 차지하는 것이 정치사범이다. 지난 시대 혁명의 기수였던 볼셰비키들 가운데도 정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들어온 이가 적잖은 모양. 엄혹하게 관리되는 감옥에서도 어찌어찌 이야기가 새나오기도 한다.
이 교도소에 젊은 검사 한 명이 부임한다. 누가 보아도 초임 검사인 기색이 역력한데, 좋은 성적을 가지고도 지방의 교도소로 발령이 난 걸 보면 기댈 구석 없는 개천용임이 분명하다. 검사가 교도소에서 하는 일이란 법이 공정하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복잡다단한 각종 법무를 사리에 맞게 처리하는 일이다. 젊은 검사 코르니예프(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 분)는 교도소장과 교도관들, 또 지역에서 암약하는 비밀경찰(NKVD)과 함께 교도소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는다.
영화는 도입부터 꽤나 인상적이다. 웨스 앤더슨을 연상케 하는 미술적인 구도가 숨을 멎게 할 만큼 완벽한 대칭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앤더슨의 미술은 영화를 동화적으로 만드는 반면, 세르게이 로즈니차가 구현한 영상미학은 숨막히게 삭막한 당시 체제의 비대함과 비인간성을 미학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영화는 교도소의 일상, 그중에서도 차마 기술할 수 없는 역사 이면의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간수가 한 늙은 죄수에서 무거운 자루더미와 성냥 몇 개를 안기며 외딴 감방에서 안에 든 종이를 채우라 명한다. 죄수가 방 안에서 자루를 쏟아 부으니 그 안에 담긴 것이 정체를 드러낸다. 다름 아닌 청원서들이다.
▲두 검사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피로 쓴 청원서를 태우라는 임무
청원서, 제가 받는 형이 부당하고 억울하다며 모스크바로 보내는 죄수들의 문서다. 어찌나 사정이 참담한지 개중에선 피로 눌러 쓴 쪽지가 수두룩하다. 절차에 따라 교도소에 접수한 청원서는 모스크바로 보내져야 할 것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외딴 방에서 태워지게 된 운명이다. 잔업이 귀찮은 교도관이 자리를 비우고 늙은 죄수 홀로 덩그러니 남아 수많은 문서를 보게 된 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단 한 장 노인이 빼돌린 쪽지가 젊은 검사 코르니예프의 손에 들어온다. 영화는 거의 삼십 분 가량의 긴 시간을 코르니예프가 쪽지를 빼돌린 나이든 죄수와 대면하는 장면에 할애하는 데 이 순간의 연출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면회를 신청하고, 탐탁지 않아 하는 상급자들의 억지 허락을 구하여 겨우 독대한 두 사람이다. 노인의 이름은 스태프니악. 그는 한때 볼셰비키로 혁명의 최전선에서 싸웠고, 법학을 깊이 공부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감옥에 갇혀 외부와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에 불과하다.
그가 간직한 청원서엔 비밀경찰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당 원로를 체포해 고문하고 살해한다는 사실, 그와 같이 억울하게 체포된 사람이 수두룩하며, 당은 비밀경찰에 선을 대고 아첨에나 급급한 젊은이들에게 장악되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노인의 몸은 고문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갈비뼈 수개가 부러지고 수시로 피를 토하는 것이 이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손에 쪽지가 들어와 있는 때문이다. 저를 찾아온 코르니예프가 그 쪽지를 전할 만한 인물이라고, 스태프니악은 믿고 있다.
상급자들이 죄다 비밀경찰에 매수된 하수인이거나 그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 겁쟁이들이란 건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법이 금하는 일을 이토록 공공연히 자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태프니악을 면담하는 일조차 무척이나 힘이 들었고, 그 이후 또한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코르니예프는 스태프니악의 말대로 확실한 선택을 하기로 한다. 이 모든 문제가 오로지 지방의 비밀경찰과 기회주의자, 또 부패한 이들이 빚어낸 결과이기에 중앙에 이 사실을 알리기로 한 것이다.
▲두 검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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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을 만나겠단 하룻강아지 검사
코르니예프는 검사다. 검찰 최고위직은 모스크바에 있는 비신스키 최고검찰총장이다. 영화는 긴 코르니예프가 스태프니악에 이어 비신스키를 면담하기 위해 떠난 길고 긴 여정을 비춘다. 상급자에 알리지 않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석에 몸을 싣고, 그곳에서 농부며 노동자들 틈에 끼여 이렇고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모스크바 관청에 도착해 총장실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이어진다. 마침내 총장실에 들어와서도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수십 명 뒤에서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다. 약속 없이 찾아온 어중이떠중이가 총장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날만큼은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기다림 끝에 만남이 주어진다.
영화는 매우 간략하고 단순한 구조를 가졌다. 지방에서 비밀경찰에 의해 자행되는 문제를 파악한 젊은 검사가 중앙으로 가서 총장에게 그를 알리고 돌아오는 게 전부다. 통상의 상업영화 문법으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긴 시간을 감옥 안에서 스태프니악과, 또 총장실에서 비신스키와의 대화에 할애한다. 그 사이엔 마치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일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한 기차 안에서의 이야기가 있고, 또 으리으리한 건물 안에서 총장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들이 있다.
코르니예프가 가져온 문건은 중대하고 시급한 사안이지만, 총장이 있는 건물 안에선 약속조차 잡지 않고 무단으로 가져온 흔한 민원이 된다. 이 관료적인 공간에서 진짜로 벌어지는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지극히 부조리하다. 코르니예프가 만남에 대한 기약 없이 대기실에서 총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거의 블랙코미디적으로 연출됐다. 한 사람이 나가고 다름 사람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코르니예프의 엉덩이가 들썩거리다, 마침내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게 될 즈음까지 기다리는 상황이 빚어진다. 모스크바로 오기만 하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리란 기대는 산산이 깨어진다. 이전의 긴박감이 오간 데 없이 거대한 건물 안에서 촌놈이 되어 헤매는 상황이 어딘지 웃픈 감상까지 자아낸다.
▲두 검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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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만 68만 명, 스탈린의 대숙청
스탈린 치하 소련의 역사를 아는 관객에게 코르니예프의 여정은 그 자체로 스릴러적이다. 대숙청이라 불린 스탈린 시대의 공포정치는 1937년과 1938년, 소련 전역에서 무려 100만 명 가량의 목숨을 앗아간 충격적 사건이다. 공식적인 사형집행만도 68만 명이 넘는데, 분야와 사유를 막론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이들이 모조리 제거 대상에 올랐다. 직접 증거가 없다 해도 상관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비밀경찰은 스태프니악과 같이 혁명에 공로가 있는 지식인이거나 기차칸 사내처럼 무지몽매한 농부를 가리지 않고 잡아들여 정치범으로 만들어냈다. 고문을 견뎌내지 못해 정치범죄에 서명한 이들과 그 가족이 끌려가 죽음을 맞았고, 끝내 저항한 이라 해도 스태프니악과 같이 고문 후유증을 견뎌내지 못했다.
수백만 명이 조사를 받았고, 68만 명이 사형을 당했다. 모두가 정치범일 수는 없었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스탈린 그 스스로가 기획해 명령했단 점에서 다른 대학살과 차별화된다. 그가 숙청하고자 했던 건 공산주의 사회에서 나름의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 개인이었고, 그 숙청으로부터 살아남은 건 어떠한 독자적 사고도 하지 않는 기회주의자나 비겁자들이었다. 코르니예프와 스태프니악 같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야말로 스탈린 대숙청의 목표물인데, 이들이 스탈린에게 고발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는 모습이 더없이 비극적이다.
대칭이 꼭 맞는 건 화면구성만이 아니다. 영화가 내달리는 방식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완벽주의적 태도 아래 조율돼 있다. 매우 느리고 정적이기까지 한 전개, 또 장면 연출은 당대 소련 체제의 현실을 빗댄 것처럼 다가온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어떠한 실무적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커다란 건물 안 높은 사람들과, 그들과 단 5분이라도 만나려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 이들, 그 숨 막히는 상황의 부조리함이 영화 <두 검사> 내내 지속된다.
▲부산국제영화제포스터부산국제영화제
더없이 인상적인 끝맺음까지
영화의 결말은 또한 이야기를 끝맺는 모범례로써 기록할 만하다. 3등석을 타고 모스크바로 왔던 이가 이번엔 검찰청에서 잡아준 2등석 객실에 타고 임지로 돌아간다. 같은 객실에 먼저 든 두 사람 중 나이든 이는 앞서 스태프니악을 연기한 배우인데, 전혀 다른 태도와 인상으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코르니예프가 제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들과 보낸 몇 시간은 그대로 영화의 희비를 가르는 주요한 순간이 된다. 과연 비신스키는 코르니예프가 믿을 만한 이였을까, 코르니예프는 무탈하게 귀환할 수 있을까. 어떤 결말을 생각하든 <두 검사>의 마지막이 주는 감흥은 그를 상회할 테다.
일의 성패를 논외로 하고, 코르니예프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이는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영화는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옳다 믿는 일을 위하여 제 일신의 안위를 내던진 이가 마주하는 모든 불편을 내보인다. 마치 "그만 돌아가"라고 외치는 듯한 상황이 그 앞에 연달아 펼쳐진다. 코르니예프가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칸 좌석에서, 으리으리한 건물에 들어서 어디가 어딘지를 찾지 못해고 헤매던 순간들에, 우연히 마주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동급생과의 대면에서, 기약 없는 길고 긴 기다림 가운데서. 지하 감옥에서 죄수와의 대면한 뒤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이 영화를 보았다. 내 안의 젊은 검사에게도 아직은 숨이 붙어 있는가를 두려워하며.
이번 부국제의 다른 훌륭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두 검사> 또한 수입배급이 확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를 기대하게 되는 건 주제의식은 물론, 형식과 미학에 있어서까지 탁월한 이 영화가 오늘의 한국 관객과 만나 빚어내는 효과가 반드시 있으리라 믿고 있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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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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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검찰총장 만나러 시베리아로 간 젊은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