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세계사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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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D. 루스벨트(약칭 FDR)는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자, 세계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합법적으로 4선에 성공한 미국 역대 최장기간 재임 대통령이다. 미국인들에게는 경제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 이라는 두 차례의 큰 국난을 모두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미국을 현재의 세계 초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장기집권에 성공한 지도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루스벨트 역시 헌법 무시, 국민 자유 억압, 권력 독점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이고 독재자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명암이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10월 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4선 대통령 루스벨트는 영웅인가 독재자인가'편을 조명했다.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 뉴욕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루스벨트의 가문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슈퍼 갑부 명문가였다. 외동아들이었던 루스벨트는 그 덕분에 '다이아몬드 수저'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명문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1905년에는 먼 친척뻘인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다. 젊은 시절부터 루스벨트는 정치인을 꿈꿔왔으며, 1908년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정계 입문을 준비했다고 한다.
1910년 6월, 28세의 루스벨트는 뉴욕주 상원의원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며 정계에 입문한다. 그가 출마한 더치스 카운티는 전통적으로 경쟁자인 공화당의 초강세 지역이었지만, 첫 선거 만에 당당히 당선되며 정치계의 '슈퍼루키'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1913년부터 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을 경험하는 등, 정계에서도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921년 루스벨트의 인생에 치명적인 위기가 찾아온다. 39세에 뜻하지 않은 소아마비 진단을 받으며 한동안 두 다리를 못 쓰는 반신불수 상태가 된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며 평생 성공 가도만을 달려온 루스벨트의 인생에 찾아온 최대의 시련이었다.
루스벨트는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와, 불굴의 의지로 긴 재활을 거쳐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46세가 된 1928년에는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소아마비 진단을 받고 투병한 지 약 7년 만이었다.
장애에 대한 인식 수준이 지금보다 더 낮았던 당시에는, 장애인이 고위공직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루스벨트는 약점인 다리 대신 손을 쓸 수 있게 특별히 개조된 차를 타고 선거 유세를 펼쳤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상황에서는 맞춤형 보조기와 지팡이 등을 활용했고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에게 의지하여 서 있는 모습을 연출했다. 철저한 이미지 관리로 인하여, 당시 미국 대중들은 루스벨트의 건강 상태와 장애 문제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루스벨트가 뉴욕 주지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사상 최대의 경제위기인 '대공황'이 찾아온다. 미국 사회는 당시만 해도 '자유방임주의' 에 익숙하여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장하며 '임시긴급 구호국'을 설치하여 주정부의 예산을 직접 집행하고 국민에게 생계지원금과 일자리를 제공하는 정책들을 펼쳤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정책들은 미국 최초로 체계적인 '사회복지체제'의 출발점이자,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이 추구하는 복지제도의 모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명성이 높아진 루스벨트는 뉴욕 주지사 재선을 거쳐 1932년 11월에는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된다. 정계 입문 22년 만에 마침내 오랜 꿈이었던 미국의 32대 대통령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듬해인 1933년 3월 4일 첫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는 "우리가 오직 한 가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라는 명언을 남기며, 당시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불안해하던 미국 국민을 위로하고 확고한 비전과 믿음을 제시했다.
압도적 승리한 루스벨트
▲벌거벗은세계사루스벨트tvn
루스벨트 행정부는 뉴욕 주지사 시절부터 추진해 온 '뉴딜(New Deal)' 정책을 통하여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의 경제구조를 재정비하는 작업을 시행한다. 루스벨트는 은행개혁, 금 회수 정책,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 등을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 정책들의 성과를 인정받아 루스벨트는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48개 주중 46개 주에서 승리하는 압도적인 승리로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국민의 지지를 확인한 루스벨트는 두 번째 임기 동안에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공정근로기준법을 시행하고 최저임금제 도입, 경제활성화를 위한 금주법 폐지와 사법개혁 등을 단행했다. 루스벨트의 정책들은 오늘날 미국과 세계 노동법의 근간을 구축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적인 개혁가'로서의 이면에, 루스벨트는 점차 독선적이고 아슬아슬한 '독재자'로서의 상반된 면모도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나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여러 정책들을 강압적으로 강행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1933년 강압적인 금 회수 조치와 해외유출 방지를 명분으로 전시에나 가능한 '적성국교역법'을 평시에 적용한 것이었다. 이는 미국인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국민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면서 헌법 위배논란까지 불러일으킨 중대한 사건이었다.
또한 루스벨트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위반하고 노골적인 연방대법원 장악을 노리기도 했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미국의 전통과 자유주의 원칙에 맞지 않다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등에 연이어 위헌 판결을 내리며 제동을 걸고 있었다. 이를 눈엣가시로 여긴 루스벨트는 대통령 임명권을 확대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는 대법관들을 대대적으로 증원하려는 대법원 개편안을 시도했으나, 의회의 압도적인 반대로 부결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루스벨트의 두 번째 임기 중에, 대공황에 이어 세계 역사를 뒤흔드는 또 하나의 대사건인 '2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당시 미국은 중립을 표방하며 전쟁 개입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유럽 지원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영원히 세계 전쟁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루스벨트는, "옆집에서 불이 나서 호스를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이웃에게 '내 호스를 사용하려면 먼저 15달러를 내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비유로, 해외 원조의 당위성을 미국민과 의회에 설득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무기대여법'을 제정하여 중립 정책과 별개로, 대통령의 판단으로 우방국에 군수물자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루스벨트의 정확한 정세 판단과 추진력 덕분에, 당시 나치 독일과 힘겹게 싸우고 있던 영국과 소련 등은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전쟁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또한 루스벨트는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2차대전은 루스벨트에게는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주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1940년 세 번째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다시 당선된다. 이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후, 민주주의를 흔들 수 있다는 이유로 150여 년간 대통령이 3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미국 정치의 오랜 관행을 깨뜨린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불안한 국내외 정세를 명분으로 반대파들의 비판을 무시하고 3선을 강행했다. 이전보다 득표율이 다소 하락했음에도 여전히 루스벨트에 대한 지지율이 압도적이었다는 사실은, 사회가 불안할수록 검증된 지도자를 원한다는 국민들의 심리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루스벨트 이후 미국은 수정헌법 22조를 보완하여 제도적으로 대통령직 3선 이상이 불가능하도록 아예 명문화시키게 된다.
세 번째 재임기간이던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인하여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참전을 고민하던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2차대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루스벨트는 전시체제라는 특수성을 활용하여 보안상 위협이 되는 이들을 자유롭게 퇴거시킬 수 있게 하는 '행정명령 906호'를 발동한다. 미국 내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일본과의 협력 가능성을 이유로 엄연한 미국 시민권자들임에도 강제로 수용소에 이주시켜 구금시켰다. 비록 독일이나 일본이 전쟁 중 자행한 홀로코스트(대학살) 등에 비견될 바는 아니지만, 이는 미국 내에서 자국민들에게 자행한 최악의 인권침해 사례로도 꼽힌다.
루스벨트는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1944년에는 4선에 출마하여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됐다. 세계역사상 비정상적으로 집권한 독재자들을 제외하고, 합법적인 시스템에서 4선에 성공한 것은 지금까지 루스벨트가 유일무이하다. 전세가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져 가던 1945년 2월, 루스벨트는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 등과 '얄타 회담'에 참석하여 전후의 국제정세를 논의했다. 그런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루스벨트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격무의 영향으로 루스벨트의 건강은 이미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는 요양지였던 자신의 별장에서 자화상을 그리다가 돌연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루스벨트가 그리다가 중단된 자신의 초상화는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루스벨트는 그렇게 4선의 임기를 시작한 지 불과 82일 만에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이 루스벨트의 자리를 이어 대통령에 올랐고 2차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마무리하게 된다.
대공황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들은, 루스벨트가 세계사에 한 획을 긋는 리더이자 4선 대통령까지 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가뜩이나 좋지 않던 그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수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만일 그가 좀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았더라면? 4선 임기와 그 이후의 정치적 행보, 그에 따른 역사적 평가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루스벨트가 남긴 양면적인 발자취는, 민주주의에서 '강력한 지도자'와 '권위적인 독재자'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깊은 화두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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