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의 비극, 인류의 오늘과 꼭 닮았네

[김성호의 씨네만세 1186]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드라큘라>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위(前衞), 말 그대로 앞을 지키는 일을 말한다. 예술과 사상에 있어 전위란, 그를 뒷받침하는 영역의 가장 앞단에서 나아갈 자리를 탐색하는 것이다. 문화예술, 그중에서도 영화에 있어서 전위적이라 불러 마땅한 작가가 등장했으니, 그 이름이 바로 라두 주데다.

2025년 한국에서 영화 깨나 보는 이에게 라두 주데의 이름은 상식이 되었다. 3년 전 <배드 럭 뱅잉>으로 전 세계에 저의 존재를 알렸던 이 감독의 신작을 올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가 개막작으로 점찍어 소개했고, 이로도 부족하여 지난해 발표한 중편영화 < 잠#2 >까지 들여와 선보였다. 개막작 < 콘티넨탈 '25 >는 라두 주데가 거장의 반열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걸작으로 기록됐다. 누구나 쉽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영화인 동시에 제목이 보여주듯 2025년 대륙, 나아가 세상의 이야기를 작가적 시선에서 다루어낸 의미 깊은 프로젝트였다.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수상작이기도 한 < 콘티넨탈 '25 >에 이어, 전주에서 마주한 < 잠#2 >는 라두 주데가 그저 재주 있는 평범한 작가가 아니란 사실을 증명한다. 앤디 워홀의 묘지에 설치한 카메라로 사계절 간 그를 찾는 관광객의 풍경을 담아낸 이 영화는 영화예술의 현재를 탐지하고 미래를 탐색하는 실험적 시도였다. 저만의 시각과 자세를 견지하며, 영화예술을 도구 삼아 동시대 인간과 소통하고 호흡하는 라두 주데의 걸음이 그대로 이 시대 거장의 그것처럼 보인 것인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 결과로 라두 주데의 활발한 작품활동을 영화예술인들은 민감하게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드라큘라 스틸컷
드라큘라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루마니아 거장이 만든 루마니아 전설의 이야기

루마니아 태생인 라두 주데의 새로운 관심은 루마니아가 낳은 역사적 위인이자, 최대의 관광상품이며, 상업적 캐릭터이기도 한 블라드 드라큘라에 가 닿았다. 흔히 드라큘라라 불리는 이의 실제 모델은 블라드 3세 드러쿨레아(Vlad III Drăculea)란 이름의 왈라키아 공국 공작으로, 오스만제국의 확장에 맞서 루마니아 땅의 민족국가 방위에 성공한 민족적 영웅이다.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동진하던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문명이니, 로마의 후예를 자임하며 민족의 이름을 루마니아인으로, 훗날 국가명까지 루마니아라 정한 이들과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아버지의 원수와 손을 잡으면서까지 이교도 제국에 맞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블라드 3세 드러쿨레아 공에겐 그림자 또한 있다. 다름 아닌 권력 안정을 위한 귀족 숙청이 그것으로, 잔치에 일대 귀족 수백 명을 초대한 뒤 이들을 모조리 말뚝에 박아 살해하는 등 잔혹한 공포정치를 펼쳤다. 공고한 권력을 다진 이후에도 엄혹한 처벌을 그치지 않으니, 블라드 3세 드러쿨레아에겐 민족적 영웅이란 평가만큼이나 잔인한 독재자란 악명 또한 따랐다. 이것이 브램 스토커와 같은 작가가 그를 모델로 흡혈귀 귀족 드라큘라를 탄생시킨 배경이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연 인상적인 작품이 바로 라두 주데의 신작 <드라큘라>였다. 동시대 거장의 신작만을 초청해 상영하는, 부국제에서 손꼽는 인기섹션 아이콘에 든 이 영화는 라두 주데가 얼마나 전위적인 감독인지를, 더불어 그가 얼마만큼 역량 있는 작가인지를 입증한다.

일찍이 드라큘라, 또 블라드 3세 드러쿨레아 공작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는 많다. F. W. 무르나우의 고전 영화 <노스페라투>를 올해 로버트 애거스가 리메이크해 동명 영화로 내놓았다. 브램 스토커의 소설을 가장 원작에 충실하게 되살린 1992년 작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대부>와 <지옥의 묵시록>을 만든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연출해 화제를 모았다. "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시간의 대양을 건너 왔소"란 한 마디 대사에 매료된 게리 올드만이 치열한 경쟁 끝에 드라큘라 역을 따낸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드라큘라 스틸컷
드라큘라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전위, 파격, 외설, 그리고

드라큘라와 영화의 만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브램 스토커의 원작 소설에서 벗어나 흡혈과 영생, 빛을 피하는 귀신, 박쥐며 동물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능력 등 드라큘라적 설정을 반영한 영화가 끊이지 않고 나온다.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작품성을 가진 <트와일라잇> 시리즈부터,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같은 작가주의적 작품, <언더월드> 류의 장르영화와 박찬욱의 <박쥐> 같은 개성 있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드라큘라를 모티브 삼아 상상의 가지를 뻗쳐나간 작품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고도 블라드 3세 드러쿨레아와 브램 스토커가 창시한 원작 드라큘라 캐릭터의 상징성 또한 여전히 유지되니, 드라큘라야말로 루마니아가 낳은 최대의 아웃풋이란 평가가 틀리지 않다.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오른 라두 주데가 <드라큘라>에 손을 댄 건 그래서 당연한 귀결이면서도 기대를 모으는 특별한 지점이 된다. 마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아니면 도깨비라거나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를 감독하듯, 그 일생의 공력을 들여 제가 나고 자란 문화의 표징이 될 작품을 제작하리란 기대가 자연스레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모든 기대를 라두 주데는 단박에 걷어찬다. 마치 추석 차례상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가서 상을 뒤집고 깽판을 치듯이, 용감무쌍과 지랄발광의 미묘한 경계 위를 넘나드는 것이다. 이 영화를 차마 견디지 못하여 극장을 뛰쳐나간 이와, 과연 작가를 보았다며 격찬하는 이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드라큘라>는 우리가 아는 어떤 영화와도 다르다. 영화 속 드라큘라는 이미 죽은 지 한참이다. 루마니아 관광지 귀퉁이의 어느 소극장에선 연극 <드라큘라>가 공연되고 있다. 식당을 겸한 참여형 연극으로, 드라큘라 역을 맡은 무명 배우와 여성 배우가 합을 맞추는 소극이다. 루마니아까지 왔으니 드라큘라 공연 하나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냔 수요를 겨냥한 싸구려 공연인데, 이 연극의 하이라이트는 관객들이 직접 무대 바깥으로 도망치는 드라큘라 일당을 포획하는 놀이가 되겠다. 그런데, 영화가 펼쳐지는 이날만큼은 분위기가 심상찮다. 여행을 온 서구 관객들이 드라큘라의 심장에 창을 꽂고 못을 박겠다고, 진심으로 결의해서다.

드라큘라 스틸컷
드라큘라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지랄염병으로 예술에 이르겠단 무모한 도전

영화는 이쯤에서 끝나지 않는다. 본 줄기가 되는 앞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한편으로, 자신이 영화감독이라 말하는 한 사내가 AI 기술을 적극 활용해 드라큘라에 얽힌 온갖 이야기를 십여 장으로 구분해 풀어낸다. 원치 않게 내연녀를 제가 모는 차 안에서 살해하는 어느 남자의 이야기가 있고, 직원들의 노동을 의미 없게 만들고 마침내 그 모두를 학살하는 악덕 사용자의 사례가 있으며, 어느 외딴 마을의 귀족 여성을 음모로부터 지켜내는 어느 학자의 모험도 있다. 하나하나가 드라큘라의 신화적, 또 전설적인 상징들을 새롭게 재조립해 빚어낸 것들로, 그 성격과 형식 모두가 제각각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기술 독재, 블라디미르 푸틴과 전쟁, 영화예술과 문학의 고전과 현재적 지위, 대중문화적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마치 드라큘라가 루마니아에 실재하는 인물과 역사로부터 출발했으나 그 활용은 서구 작가며 산업에 의해 제멋대로 활용되듯이, 라두 주데의 영화 속 수많은 이야기 또한 드라큘라가 어디까지 가지를 뻗어나갈 수 있는지 실험하는 장처럼 활용된다. 이빨을 박고 남의 피를 빨아들이는 건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사용자와 노동자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자본을 넘어서 성별이라거나 계급, 심지어는 도덕과 가치의 이야기로까지 전환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라두 주데는 이를 그저 문학적 상징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쟁과 과학 등 세계사적으로 실재하는 주제들을 전 지구적으로, 또 루마니아와 지역 문화권에 한정해서까지 적극적으로 비유하고 또 허물어간다.

다분히 유쾌하고 가벼운 이 영화는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세계사와 문화사, 또 문화예술의 견지에선 더없이 진지한 작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수많은 죽음과 폭력, 심지어 남성과 여성의 성기며 성행위까지 적나라하게, 또 어처구니없이 등장하는 순간들이 혹자에겐 불쾌감이며 불편함을 자아낼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정형화된 예술, 재미며 아름다움 등 미학적 덕목을 추구하는 일련의 작품만이 영화가 이를 수 있는 유효한 표현법은 아니다.

라두 주데는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하고, 코믹하면서도 뼈를 강타하는 영화를 찍어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려 170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을 서로 직접 관계하지 않는 수많은 곁가지와 본줄기의 교차적 결합으로 다루었으며, 그 표현법에서도 관객을 부정적으로 자극하고 도발하기를 피하지 않는다.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부산국제영화제포스터부산국제영화제

무엇이 중한가를 되묻게 된다

이 영화의 출발은 다분히 우연적이었다 해도 좋겠다. 루마니아 국립영화센터(CNC)에서 연달아 제작지원에 떨어진 라두 주데가 루마니아에선 결코 무시되지 않는 '드라큘라 영화도 있는데'라고 허풍을 떤 것이다. 장난에서 시작한 작업이 진지한 프로젝트로 이어지고, 그 사이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은 루마니아, 동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 그의 이름을 영화예술 가장 앞단에 적게 할 만큼의 성취를 가져왔던 일이다. 그렇게 드라큘라는 거장의 숙명적 작업이란 기대를 받았고, 또 그것이 완전히 틀린 평가도 아니어서 관객은 마치 퇴근 길 숭악한 뱀파이어를 마주하듯 경악하여 극장 좌석을 박차고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고 만다.

라두 주데는 정말 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묻는다. 잔인하고 불쾌하며 외설스럽고 폭력적인 드라큘라 소동극들 가운데서 분명히 두드러지는 건 괴물의 만행이 아니다. 점잖은 인류가 동시대 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범죄극이다. 또한 인류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기술문명이다. 이를 알면서도 엔터테인먼트처럼 소비하기만 하는 대중들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제도로 기능하는 구분과 압제, 착취들이다. 그 모두를 보고도 고작 남녀의 교합이나 드라큘라의 흡혈쯤은 불쾌하다 하는 이가 있는가, 라두 주데가 묻고자 하는 것이 이러한 물음이라고 믿는다.

이토록 전위적이며 혁신적이고 유효한 영화를 한국인이 끝끝내 볼 수 없으리란 건 참담하기까지 하다. 올해 부국제에서 수입배급이 확정된 일군의 영화들과 라두 주데와 같은 작가의 작품 사이엔 간극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동시대성 있는 이야기가 없는 듯 취급되는 현실에 대해 한국 관객들은 보다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텃밭을 탓하지 않는 농부의 자세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빈곤을 오늘의 영화예술계가 현격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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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