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제 2관왕 '철들 무렵', 모두가 칭찬하는 이유 있었네

[김성호의 씨네만세 1185]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철들 무렵>

<철들 무렵>을 볼 계획은 없었다. 한국의 비좁은 문화지반이 유효한 영화라 할지라도 수입배급되지 않아 영영 만날 수 없는 영화를 수두룩하게 남기는 탓으로, 국제영화제 기간엔 대부분 해외 영화에 관심을 맞추는 때문이다. <철들 무렵>이란 작품이 있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언제고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거니, 자연스레 다음을 기약했던 것이다. '비전' 섹션에 든 많은 작품에 그러하듯.

우연일까 필연인가. 영화제 기간 동안 세 차례나 <철들 무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철들 무렵 스틸컷
철들 무렵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입 모아 칭찬하는 작품, 어떤 매력이기에

기자며 평론가들이 들어찬 프레스센터에서였고, 다음은 영화제가 열리는 부산 센섬시티 인근 카페에서였다. 마지막은 지인들이 모인 술자리에서였다. 의도치 않은 자리마다 거듭 들려오는 호평에 마침내 일정을 수정하여 영화 한 편을 더 보고 가기로 결정했다. 마침 <철들 무렵>은 이번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과 송원 시민평론가상 수상의 영광까지 안았다. 모두가 좋다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철들 무렵>은 정승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다. 한국 독립영화를 눈여겨보는 이들에게 정승오는 2020년 작 <이장>을 만든 이로 기억돼 있을 테다. 지난 2020년 개봉한 <이장>은 아버지 묘 이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 가족 내의 소소한 이야기로, 무겁지 않은 시선으로 가부장제의 모순을 위트 있게 풀어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정승오가 5년 만에 선보인 <철들 무렵>은 전작에 이어 또 한 번 한 가족을 소재로 한국사회의 일면을 조명했다.

서류상엔 부부이지만 사실상 갈라선 지 오래인 철택(기주봉 분)과 현숙(양말복 분)이 있다. 또 이들의 딸 정미(하윤경 분)와 정미의 외할머니이자 현숙의 어머니인 옥남(원미원 분)까지가 영화의 주역이다. <철들 무렵>은 이들 네 사람을 중심에 두고서 이들 가족의 마냥 웃을 수도, 또 울 수도 없는 서글프면서도 공감가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네 사람에겐 저마다의 고단함이 있다. 철택은 암 말기 진단을 받고 죽음을 코앞에 뒀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도 운동권에 몸담았다 취업길이 막혀 단단히 꼬인 삶을 사는 철택이다. 용접기술을 배워 어찌저찌 밥벌이를 하고 있다지만 매일 같이 술에 절어 엉망진창으로 살아간다. 자연히 가정도 내팽개치고 사실상 아내에게 버려진 철택은 모아둔 돈도 없이 시한부 환자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철들 무렵 스틸컷
철들 무렵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말기암 아버지 간병 떠맡은 단역배우의 고충

철택에게도 기댈 곳이 아예 없지는 않다. 철택의 딸인 정미가 하루아침에 그를 간병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저 말고는 손 벌릴 곳이 마뜩찮은 아버지를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때문이다. 그러나 저라고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 정미는 벌써 수년 째 단역만을 전전하는 무명 배우인 것이다. 돈이 없기로는 철택이나 정미나 거기서 거기라서, 둘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여기저기 돈을 꾸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일찌감치 철택과 갈라서 혼자가 된 현숙이지만 그녀라고 마음이 편하지 않다. 엄마 옥남의 구순잔치에 즈음하여 오빠와 누나들이 모두 현숙에게 옥남을 맡으라 떠미는 때문이다. 요양원은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며 혼자 살 바에 엄마와 함께 지내면 오죽 좋으냔 게 형제들의 주장이다. 혼자 사는 삶에도 고충이며 계획이 있지만, 미리 입을 맞춘 듯이 몰아치는 형제들에겐 당해낼 재간이 없다. 어찌저찌 구순 잔치 준비를 전담하는 것으로 그를 갈음해보려 하지만 현숙의 상황 또한 제 마음과는 영 달리 돌아간다.

여기에 더하여 옥남의 이야기가 깊이를 더한다. 모두가 이제는 떠맡아야 할 짐짝처럼 여기는 노인의 삶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 치열하고 버거운 것이었음을 알도록 한다. 일제강점기의 배고픔과 강제노역, 학살과 군부독재, 그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의 파고가 옥남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풀려 나온다. 어느 자식도 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밀어만 대는 현실이지만, 그녀야 말로 온 힘을 다해서 제 삶과 맞서 살아온 인물이란 걸 관객은 알게 된다. 그녀의 아들딸, 사위와 외손녀가 각자의 어려움에 휩쓸리며 살아가듯이, 옥남 또한 그와 같은 여정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을 것이다.

철들 무렵 스틸컷
철들 무렵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누가 안다 말할까

정승오 감독은 간병과 돌봄, 또 가족행사라는 계기를 통하여 파편화 된 작은 가족을 대가족 집단으로 복원해낸다. 대가족의 구도 안에서 좀처럼 드러날 일 없던 서로 다른 세대와 자본계급의 충돌, 또 어우러짐이 빚어진다. 인간의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욕구와 고난 또한 표면 위로 떠오른다. 나이는 먹었으나 여전히 누구도 제 삶을 제대로 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영화 속 인물 뿐 아니라, 영화 밖 관객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평생을 한 길만 보고 내달린 인생에서 잘못 살았구나 후회하는 이가 수두룩 빽빽이다.

잘 살고 못 사는 일이 어디서 어떻게 갈라지는지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나이와 처지의 여러 인물이 제각기 제 인생과 마주하는 동안, 관객은 '인간이란 끝끝내 철이 들지 않는 건 아닐까'를 의심하게 된다. 철이 든다는 것, 삶을 제대로 살아간다는 건 무얼 말함인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철들 무렵>은 개인적 과업을 풀어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각자가 마주한 고난은 모두 한국사회의 문제와 얼마쯤 닿아 있는 때문이다. 간병과 돌봄에 대한 부담을 마치 러시안 룰렛처럼 탄창을 돌려 정하는 일이 한국사회엔 대체 얼마나 많은가. 그저 운이 있고 없다는 이유로 누구는 삶이 파탄에 이르고, 다른 누구는 안온함을 누린다. 그 부조리함 가운데서 사회적 책임이, 또 공동체와 가족의 역할이 분명히 있을 것인데도, 우리는 그를 표면 위로 끌어올려 솔직한 고충을 나누는 일이 드물다. 영화 속 인물들이 하나 같이 그러하듯.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부산국제영화제포스터부산국제영화제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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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