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의 한 장면
어쩔수가없다
선출(박희순 분)과 범모(이성민 분), 시조(차승원 분)는 만수와 수십 년간 같은 업종에서 일해온 전문가다. 얼마든지 경쟁할 상대가 아닌, 힘을 합쳐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관계다. '의자 뺏기'를 강요하는 야만적인 사회 구조에 맞서 어깨 겯고 저항해야 하는 동지이기도 하다.
영화 속 회사, 곧 사회는 그들의 협력을 방해하고 경쟁만이 살길이라며 해고를 일삼는다. 자본의 위세 앞에 노동조합은 무기력하고, 개인의 역량과 잠재력은 낭비되고 소진된다. 범모가 술독에 빠져 살고, 시조가 뜬금없는 구둣가게의 직원으로 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학교에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모습이 펼쳐진다. 대학 진학에 목매단 교실에는 오로지 경쟁만 있을 뿐이다. 협력은 차라리 '악'이다. 자기의 성적보다 친구의 그것을 더 궁금해하고, 100점보다 1등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하다. 등급과 서열이 모든 걸 증명하는 극한의 전쟁터다.
그조차 다른 선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외길'이다. 서울이 지방의 모든 걸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처럼, 같은 분야랄 수 있는 '의치한약'조차 대입에선 의대 한 곳으로 수렴되는 모양새다. 최근 치대와 한의대, 약대 재학생들이 자퇴한 뒤 의대 진학을 꿈꾸는 현실은 기괴하다.
취업 앞에선 한솥밥 먹은 노동자의 연대 의식이 힘을 잃고, 대입 앞에선 친구와의 우정은 사치로 치부된다.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숙의의 과정을 노동자와 학생 등 개인에게 책임을 미룰 수 없다. 서로에 대한 연민만이 그들이 배려할 수 있는 최대치다.
만수가 범모와 시조를 살해할 목적으로 찾아간 뒤 느끼는 찰나의 연민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경쟁자인 친구들에게 느끼는 그것과 흡사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고통스러워하다가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순간 '널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내가 떨어진다'고 다짐한다.
눈을 찔끔 감고 만수가 경쟁자들을 차례차례 쏴 죽이듯, 아이들도 등급 경쟁자들을 하나둘씩 밀어내고 승자의 쾌감을 맛본다. 명절 연휴에도 학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는 불안과 초조는 성적표에 찍힌 숫자로 상쇄된다. 와중에 시험 성적은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성역'이 된다.
만수가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재취업에 성공하는 순간 섬뜩한 공포감을 느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인 만수를 내심 응원하고 있는 내 모습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행사하는 폭력은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이기적인 본성이 은연중에 작동한 것일까.
만약 아이들이 본다면, 만수의 행위에 빙의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듯하다. 영화 속 재취업을 위한 몸부림을, 대입을 위한 공부로 치환하면 만수가 곧 수험생 자신이다. 만수의 엽기적 살인 행각에 놀랄지언정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질 것이다.
영화 속 유일한 희망은 미리의 낙천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다. 전쟁터 같은 현실 속에도 협력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려는 태도는 지금 교실에 몇 남지 않은 '모범생'의 그것과 닮았다. 모두가 절망을 이야기할 때 끝까지 희망의 이유를 설파하는 그의 존재가 더없이 고맙다.
학교에 '미리'들이 남아 있지 않다면, 교사들은 교육자적 소명을 포기한 채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아가게 될 테다. 그들로 인해 힘을 얻고, 더 많은 '미리'들을 길러내고 그들의 선한 영향력을 확산하기 위해 오늘도 몸을 불사른다. 부디 현실에서는 그가 진짜 주인공이어야만 한다.
토론 수업을 준비하며 주제를 선정할 때 피하게 되는 게 하나 있다. 현실성이 없는 주제로 토론을 벌이면, 설령 의견이 모인다고 한들 하나 마나 한 말장난으로 끝나기 일쑤다. 아이들은 이구동성 뻔하디뻔한 도덕적인 결론은 되레 토론의 효능감을 떨어뜨리게 된다며 비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학벌 구조의 혁파에 관한 주제다. 문제점에 대해선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고 누구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매번 '토론을 위한 토론'으로 마무리되고 만다는 거다. 그때마다 토론자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이 이것이다.
"어쩔 수가 없잖아요."
자신과 경쟁하고 비교할 대상은 옆의 친구가 아니라 어제의 자신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도 헛짓이다. 철옹성 같은 학벌 구조도, 기세등등한 자본주의 체제도 끝내 허물어지게 될 거라고 확언해도, 아이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되레 "어느 세월에?"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언제부턴가 교실에서 협력과 모둠, 동아리, 공동체, 나눔, 연대 등의 단어가 낯설어졌다. 지금 교실의 삭막한 풍경은 머지않은 미래의 우리 사회의 모습일 테다. 혹자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풍자하는 영화라고 했지만, 난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를 예언한 작품으로 해석한다.
우리 교육에 던지는 화두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한 장면CJ ENM
<어쩔수가없다>는 학부모와 교사가 먼저 봤으면 하는 영화다. 등장인물의 대사와 소품 하나에도 우리의 비루한 교육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눈 밝은 이들이라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끝내 좌절감과 열패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교육의 구조적 모순을 깨닫게 될 테다.
만수가 잘린 회사는 노동자들이 종이를 만드는 제지 공장이고, 재취업에 성공한 회사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하는 첨단 공장이다. 이 두 공장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사회 구조의 변화와 노동의 존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 교육에 던지는 묵직한 화두이기도 하다.
만수가 분재의 모양을 교정하려 하지만, 결국 부러지고 마는 장면에선 사회 구조적 모순을 개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온존한 학벌 구조에 맞서기보다 순응하는 편이 낫다는 거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책하고 자해하거나 타인을 공격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도 교실과 복도의 분리수거함에는 에너지 음료의 빈 캔이 수북하다. 하루에 고작 3~4시간만 자고도 너끈히 버티게 해주는 '학습 도우미'다. 몇몇 아이들은 이를 '신의 물방울'이라고 불렀다. 건강을 해치게 될 줄 알면서도 왜 마시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쩔 수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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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