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때문에 전염병 퍼졌다? 마을에 퍼진 소문의 진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183]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 포워드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

영화예술의 현재적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주된 창구가 바로 영화제다. 창작자가 제 작품을 세상에 발표하고 동료 작가며 평론가, 관객에게 평가를 받는 장이다. 또한 지역 문화예술의 가능성을 환기하고 수입과 배급 등 거래가 체결되는 마켓으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 영화제 가운데서도 전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프랑스 칸영화제다. 베니스와 베를린, 또 지역영화제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아카데미시상식 등이 경쟁하지만, 전 세계 최고의 작가들이 경합하는 독보적 지위를 가진 곳이 칸영화제란 데 이견은 없을 테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은 곧 동시대 최고 수준 작가들이 경합하는 장이다. 칸영화제는 경쟁부문과 함께 다채로운 섹션을 운영하며, 그저 수준에의 추구만이 저의 유일한 지향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중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이 있다. 경쟁부문을 제한다면 가장 인지도 높고 주목받는 섹션이다. 베니스, 베를린에서 최고상을 받은 작품 못잖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대상을 받은 영화도 전 세계적 관심을 받고는 한다. 한국에서도 홍상수와 김기덕이 이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바 있다.

뚜렷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지역과 문화를 배경으로 한 젊은 작가들, 또 독창적 시각과 태도를 견지한 작품들이 이 부문에 주로 초청되곤 한다. 올해 열린 제78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작은 칠레 출신의 젊은 감독 디에고 세스페데스의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이 차지했다. 수상작 선정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부문 심사위원장은 과거 대상을 받기도 했던 영국 출신 여성감독 몰리 매닝 워커가 맡았다. 새 시대 비주얼리스트이자 여성과 정체성 문제를 민감하게 다뤄왔던 그녀의 성향이 수상작 선정으로 그대로 이어졌단 평가다.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 스틸컷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칸이 선택한 '주목할 만한 시선'

부산국제영화제는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작을 한국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되고는 한다. 올해 또한 마찬가지다.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이 '플래시 포워드' 섹션에 초청된 12편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칸영화제 초청작이 12편 중 무려 8편이나 돼 칸영화제의 선도적 지위를 부산국제영화제 측이 각별히 고려하고 있음을 확인케 했다.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은 1980년대 칠레의 광산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광부가 유독 영화예술 가운데 인기가 있는 직업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도 육체노동의 특성, 위험하고 고된 환경 등이 상징적이며 극적 효과를 발하는 때문일 테다. 그런데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광산마을을 배경으로 하지만 광부들은 조연일 뿐, 서사의 중심에 서는 건 그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파는 이들이다. 노동자들의 휴식처가 되는 작은 바, 그곳에서 일하는 게이와 트랜스젠더들이다.

주인공은 10살을 조금 넘긴 소녀 리디아(타마라 코르테스 분)다. 아이의 집은 게이와 트랜스젠더로 가득한 바다. 노동자들이 마시고 취하며 쾌락에 의지하는 술집에서, 그것도 일반적인 형태의 가족이 없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가까이 다가서보자면 이 같은 우려는 편견일 뿐이란 것을 금세 알게 된다. 리디아에겐 그녀를 더없이 사랑하는 트랜스젠더 엄마 플라밍고(마티아스 카탈란 분)가 있고, 또 피가 섞인 가족 못잖게 그녀를 감싸는 이모, 삼촌들이 있는 것이다.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 스틸컷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게이 가족 때문에? 외톨이 소녀의 험난한 삶

그러나 어디 삶이 완벽하기만 할까. 리디아에게도 어려움이 있는데, 다름 아닌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마을 또래 아이들과 리디아의 배경이 너무나도 다른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광부의 자식이지만, 리디아는 그렇지 않다. 그것도 다른 아이들의 엄마가 비난하고 모욕하는, 심지어는 아빠인 광부들조차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성소수자들과 함께 사는 아이다. 티끌만큼의 다름도 놀림이며 따돌림의 재료로 쓰는 아이들이니 리디아의 처지야 짐작할 만하다.

리디아에게 쏟아지는 놀림과 괴롭힘은 나날이 그 정도가 심해진다. 또래 남자애들이 리디아를 물에 빠뜨리고 전염병을 퍼뜨린다며 모욕하는 모습으로 채워진 도입부는 리디아가 마주한 집 바깥 환경이 어떤 모양인지를 단박에 일깨운다. 초등학생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고통이 아닌가.

전염병, 그건 이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된다. 마을에선 벌써 여러 사람이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 주검이 됐다. 오로지 바에 드나든 남자만이 죽어나간 상황은 이 병에 대한 요상한 소문을 남겼다. 바에 사는 성소수자들과 눈을 마주쳐서 전염되었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점점 더 죽어나갈수록 소문 또한 퍼져나가고, 마침내 마을 사람들이 행동에 나선다. 바를 점거하고 게이와 트랜스젠더들의 눈을 가려 감시하기로 한 것이다.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 스틸컷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무지에서 피어난 혐오, 혐오가 만든 파국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의 줄거리는 간명하다.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집단적 핍박, 무지에서 출발한 혐오가 무절제하게 퍼져나가는 상황의 심각성을 부각하는 것이다. 광부들의 조직적 행동과 이에 대한 저항 사이로, 리디아의 엄마인 플라밍고와 그에게 집착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을엔 혐오와 탄압만이 있지 않다. 우정과 사랑, 유대와 연대 또한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좋은 것은 혐오의 대상인 바에서 태동한다. 저를 침탈한 이들까지 사랑하는 이들, 서로의 외로움을 딛고서 간절한 사랑을 피워내는 사람들이 카메라의 중심에 선다. 이토록 귀한 것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마침내는 깨어지는 광경이 영화의 줄기이고, 또한 그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마음과 마음을 건너 이어지는 미덕이 영화가 피우는 꽃봉오리가 된다.

퀴어, 부조리한 남성성, 시대고발 등이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겠다. 아이의 시선에서 좋은 것이 세상에선 나쁜 것이 되고, 또 나쁜 것이 마땅한 것이 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은 어딘지 단단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아이의 순박한 시선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일들이 그저 어른들의 무지함과 비겁함에 따른 것이란 건 영화를 보는 이에게 쉽게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을 안긴다. 그러나 영화는 그저 세상에 대한 실망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 속 세상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면이기도 하단 점을 확인케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제 주변을 돌아보도록 이끄는 것이다.

다만 예년에 비해 다소 아쉬운 대상작이란 평에도 설득력이 없지 않다. 소수자며 퀴어란 소재가 심사위원장인 몰리 매닝 워커의 관심과 꼭 맞아떨어져 고평가를 받았으리란 분석도 그럴듯하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의식과 그를 풀어내는 방식은 기존 감독들, 이를테면 페드로 알모도바르며 퍼시 아들론, 패트리시아 리건 등의 작업과 닮아 있다. 주목할 만한 시선이 독자적 문제의식이나 영화적 시도,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 등을 따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과연 <신비로운 플라밍고의 눈빛>이 그만한 작품인지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혐오와 편견, 저항과 욕구가 아무렇게나 뒤섞인 이야기가 이름처럼 신비롭다기보다는 전형적 퀴어영화처럼 다가오는 순간이 많은 때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부산국제영화제포스터부산국제영화제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신비로운플라밍고의눈빛 디에고세스페데스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