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사라진 시대? 무너진 디카프리오가 던진 묵직한 질문

[리뷰]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겉은 MZ 속은 꼰대인 슬픈 액션영화 [안치용의 영화리뷰] 더는 아무도 묻지 않지만, 그래도 묻자면, 지금 우리는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를 사는 것일까. 계급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은 사라지고, 자본의 지배와 소비의 위안 속에 고립된 개인이 내면의 불안을 쌓아가는 오늘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통해 평온한 이 시대에 이 묵직한 질문을 스크린 위에 던졌다. ⓒ 안치용의 시네마 인문학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필자가 대학생일 때만 해도 혁명은 당대의 현실이자, 자본주의 외 다른 발전 경로를 꿈꾸는 이들의 휘장이었다. 체 게바라가 아이돌처럼 젊은이의 가슴에 자리 잡아 열정의 불을 지피고, 서구 민주주의와 냉혹한 자본주의의 대안과 변혁적 이데올로기를 모색했다. 한국 사회 역시 1990년대의 어느 시점까지는 근본적인 사회 변혁에 관한 논의가 치열하게 이어졌다. 체제 전복은 지배자들에게 불온한 구호였겠으나, 청춘의 현실적인 행동 목표이자, 지성사의 중심에 놓인 뜨거운 화두였다.

혁명이 사라진 시대에 던지는 혁명적 질문

그러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이래, 정말로 공교롭게 역사는 정지하고 말았다. 혁명이라는 거대 서사는 힘을 잃었고 사회변혁 담론은 폐기된 유물이 되었다. 냉전 종식, 세계화의 전면적 도래와 함께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과 결합한 신자유주의가 유일한 이데올로기의 승자로 군림하면서,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모든 진보적 논의가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원인인지 결과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영향 아래 거대 담론과 보편 가치가 해체되면서, 인류 구원을 목표로 한 혁명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이 철회된다. 거대하고 동일한 이념을 추종한 집단적 투쟁이 잦아든 뒤 파편화·개별화한 소규모의 정체성 운동만이 운동으로 명맥을 이어갈 뿐이다. 21세기의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같은 비교적 '전통적'인 저항 운동마저 표면상 계급적 분노를 드러냈으나, 체제의 근본적인 전복 대신 시스템 내의 재분배나 개혁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외침은 잦아들었다. 현실의 체계적 부조리조차 개인의 성공 혹은 실패라는 시스템 내부의 문제로 해석되는 시대로 수렴되고 말았다.

더는 아무도 묻지 않지만, 그래도 묻자면, 지금 우리는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를 사는 것일까. 계급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은 사라지고, 자본의 지배와 소비의 위안 속에 고립된 개인이 내면의 불안을 쌓아가는 오늘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통해 '평온한' 이 시대에 이 묵직한 질문을 스크린 위에 던졌다.

영화는 변혁의 이상을 지키려다 세상의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 혁명의 패잔병과 그 빈자리를 채우며 독버섯처럼 득세하는 새로운 극단주의 간의 대결을 그린다. 광활한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추격 블록버스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혁명 종언 이후 시대의 새로운 역사의 침로에 관해 성찰한다.

묵직한 질문과 진지한 성찰은 흥미롭게 박진감 넘치는 액션 영화로 구현됐다. 관객은 혁명의 낯선 구호에 당황할 틈이 없이 영화의 흐름에 휩쓸려간다. 한때 혁명가였으나 이제는 무너진 삶을 사는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과거의 숙적 스티븐 J. 록조(숀 펜)에게 납치당한 딸 윌라 퍼거슨(체이스 인피니티)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뜨거운 추격 블록버스터가 짜임새 있고 빠르게 또 화끈하게 전개된다. 문제의식은 텍스트의 저변에 잠재한다.

액션영화로도 매력적인 작품이며 그중 클라이맥스 격인 자동차 추격 장면이 특별히 인상적이다. 앤더슨 감독은 CGI를 배제하고 실제 로케이션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생생한 카체이싱을 구현해 관객에게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기분"(BBC)을 느끼게 한다.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를 증명한 장면이다. 텍사스 엘 파소에서 캘리포니아 유레카까지 이어진 로케이션 속에서 펼쳐진 추격전은 내내 폭발 직전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디안드라 역의 레지나 홀은 "그(앤더슨)는 단 세 대의 자동차로, 심지어 차선 변경 하나 없이 자동차 추격전을 숨 막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는데 과한 말이 아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 스펙터클한 액션과 영상에 심오한 메시지를 조화롭게 탑재한다. 영화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와 거리가 멀다. 허당미 가득한 밥 퍼거슨은 이상을 잃고 현실에서 좌초해 늙어가는 구세대를 상징한다. 그의 대척점에 선 록조 또한 고전적인 악한이 아니다. 복합적인 인간성을 지닌 이 악당은 사악한 시스템의 UI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혁명의 유물과 극우의 상징으로 표현한 우리 시대

두 캐릭터 밥 퍼거슨과 록조의 대립과 대결은 따라서 선악 구도 같은 건 아니다. 현대사의 첨예한 이념 대립과 그 결과물인 혁명의 퇴조와 극우의 득세, 이어진 변화한 시대의 잔혹한 풍경을 반영한다. 관객 중엔 록조를 보며 도널드 트럼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을 법하다. 밥 퍼거슨은 과거 자유를 추앙한 혁명가였지만, 시간이 흐른 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도망쳐 숲속에 은둔한 혁명의 패잔병이다. 그는 현실에 투항하지 않았지만, 패배의 후유증으로 무너진 삶을 살며 자기 세대의 이상이 남긴 폐허 위에서 고립된 채 살아간다. 술과 마약이 인생의 의의이며 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 외에 다른 삶의 목표가 없다.

숙적 록조는 잔인함과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악역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라는 인종주의적인 극우 조직에 가담하기 위해 흑인 여자를 좋아한 과거의 '불미스러운'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그는 여전히 사회 전면에 나서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또 부끄러움을 지각하지 못하는 현재 극우 세력의 초상이다. 퇴보하는 혁명과 득세하는 극단주의라는 현시대의 가장 심각한 병폐를 감독은 두 캐릭터의 대립 구도와 추격전에서 구현했다. 두 인물의 대결은 사적인 복수극을 넘어, 시대의 현상을 표현한 정치 서사극으로 확장된다.

작품은 "대의를 믿고 혁명을 시작했지만 후회할 만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다음 세대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한다. 정치적 양극단을 그리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의 조건에 관한 탐색이 이루어진다. 베니시오 델 토로가 연기한 '세르지오'의 "자유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라는 대사가 핵심 메시지일 것이다. 신념을 잃고 목적을 잃고 표류한 밥이 딸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다시 용기와 사랑을 되찾는다는 결말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세대 간의 이해와 보편적인 가족애를 통한 감동 또한 영화예술의 부수적 산출물로 표현된다.

미래로 향하는 두 가지 경로

이 영화의 가족애가 혈연의 질김과 뭉클함에 머물지 않고, 혁명 정신의 계승이라는 엉뚱한 전언을 던진다는 데서 연출의 묘미를 찾을 수 있다. 밥의 좌절한 이상, 그의 동료 혁명가이자 아내인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의 강인한 저항 정신과 실패의 경험이 그들의 딸 윌라에게 고스란히 흐른다. 아버지의 자유정신을 이어받은 윌라는 세르지오로부터 가라데를 배우고, 어머니의 불굴의 기질을 물려받아 납치 이후 스스로 탈출을 시도하는 능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부모 시대를 계승하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의 대미는 이전 세대의 실패와 좌절을 넘어선 미래의 희망을 분명히 한다.

이 지점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제시하는 새 세대의 새 희망은, 혁명의 아이콘이 자본에 포섭되어 킬러의 겉멋이 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의 체 게바라 티셔츠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길복순>에서 킬러의 티셔츠가 된 체가 저항의 냉소주의적 상품화의 길을 걸어 말하자면 치열한 이념이 가벼운 패션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를 서글프게 소묘한다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결말은 이념의 폐허 위에서 새롭게 투쟁을 시작하는 혁명 전통의 희망의 싹을 시사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아직 우리가 시스템 바깥에서 진정한 자유를 꿈꿀 수 있음을 젊은 혁명가로 첫발을 내디디는 윌라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포스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포스터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정언명법으로 희망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결말은 밥 퍼거슨과 윌라가 재회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해피엔딩이다. 액션영화로도 그렇다. 그러나 의미의 동학에서는 이 결말이 시스템의 근본적 전복이 아니라는 점에서 완전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절망을 떨어버리고 새로 출발했다는, 부분적 희망의 확보 정도의 의의를 찾아낼 수 있겠다.

특히 마지막까지 끈질긴 생명력과 집요한 탐욕을 자랑한 록조의 종국의 몰락이 퍼거슨 부녀의 단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몸담았던 극단주의 조직 내부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 장면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뚜렷이 한다. 극단주의의 온존은 물론 발전과 성장을 시사한다. 반면 혁명 진영은 어린 윌라를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참이다.

이러한 비대칭의 대미 속에서 밥과 윌라의 재회와 새 출발은 일종의 정언명법이다. 희망을 희망해야 한다는 시대의 명령으로 들린다. 거대한 변화를 추동한 혁명세력이 퇴조하고, 불완전한 내부의 악당을 제거하는 등 극단주의가 점점 진보하는 상황에서 부녀가 다시 만나 새로운 세대의 저항 정신을 이어가는 모습은 시스템 밖에서 끊임없이 윤리적 대안과 인간적 연대를 추구해야 할 책임을 말한다. 물론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 블록버스터로 소비해도 큰 지장은 없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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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세계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