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위기다. 제작과 배급, 상영에 이르는 영화산업의 고리들이 하나하나 존폐의 위기와 맞닥뜨렸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서비스의 확장정책과 숏폼 형태의 영상콘텐츠가 범람하는 경향 가운데서 1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내고 극장을 찾아 2시간 내외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영화가 더는 경쟁력이 없다는 위기론이 제기된다.
극장이 어렵단 건 관객이 찾지 않는단 이야기다. 투자된 돈이 회수되지 않는단 뜻이다. 천만영화 대박도 본전은 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노려볼 수 있다. 적자를 면하는 최저선인 손익분기점이 마치 흥행선인양 공공연하게 거론된다. 불과 10년 전엔 그저 고려하는 지표 중 하나였으나, 이제는 모든 영화가 고심을 거듭해야 하는 생존선이 됐다. 손익분기를 넘지 못하는 영화가 그토록 많아졌다는 뜻이다. 나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배가 태반이던 대항해시대 초엽과 마찬가지로, 영화판에선 지속가능성을 도모하는 건전한 투자는 찾기 힘들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적 흐름만이 엿보인다.
▲귀목: 피의 혼례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떠오르는 베트남 영화의 오늘
많은 이들이 이것이 자연스런 시대적 변화라고 말한다. 너도 나도 OTT에 가입해 안방에서 저렴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구태여 극장을 찾을 요인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영화평론가며 칼럼니스트를 자임하는 이들조차 매체에 그런 의견을 발표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게으른 치들의 목소리일 뿐이다. 한국에 한한다면 틀리지 않은 이야기지만, 전 지구적 현상이라거나 시대적 흐름이라 말하기엔 어렵다. 영화산업이 여전히 뜨거운, 확장하고 발전하는 문화권이 수두룩한 때문이다.
동남아, 그중에서도 베트남은 영화산업이 달아오르는 대표적 국가로 꼽힌다. 1억 명이 넘는 인구와 빠르게 발전하는 경제수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잠재력까지를 높이 평가한 CJ그룹이 일찌감치 진출해 제작과 상영 모두에서 큰 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트란 안 홍처럼 유럽과 접점이 있는 작가들이 세계적 수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그 뒤를 잇는 신진 창작가들도 꾸준히 밀려나오고 있다. 2023년엔 팜 티엔 안이 또 한 번 황금카메상의 영예를 베트남에 가져다주기도 했던 것이다. 칸영화제 신인 감독상격인 이 부문에서 한국이 수상은 물론 특별언급작조차 배출하지 못했단 점은 주목할 만한 시각을 가진 신진작가가 메마른 환경을 돌아보도록 한다.
베트남 영화의 성장은 그저 작가의 등장에 그치지 않는다. 산업 전체가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CJ가 투자해 지난해 개봉한 쩐 탄의 < Mai >는 베트남 역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갈아치우고 넷플릭스에 입성했다. 지난해 베트남 전체 극장수입은 4조7000억 베트남동(약 2500억 원)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추산 연간 1조원을 조금 넘기는 한국 극장수입에 비해 적지만 현지 물가와 양국 간 극명히 대비되는 성장과 쇠퇴의 추세를 고려하면 추월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을 정도다. 베트남 영화산업의 확장을 바라보며 20여 년 전 날개를 활짝 펼치던 한국영화의 모습을 연상하게 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귀목: 피의 혼례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부국제 초청에 수입배급까지, 어떤 매력이기에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도 베트남 영화 수편이 들어왔다. <사이공의 연인> <우리의 손을 잡아주는 강> <머리카락, 종이, 물...>, 그리고 <귀목: 피의 혼례>까지 네 편이나 됐다. 30주년 기념행사로 열린 'Vietnam Night'에도 열띤 관심이 이어졌다. 베트남 영화가 아시아 전역에서도 단연 주목할 만한 흐름 위에 있음을 돌아보게 했다.
이중에서도 <귀목: 피의 혼례>는 곧장 수입돼 한국 개봉을 앞둔 작품이다. 레반 끼엣의 장편 공포영화로, 베트남 현지에서도 이달 개봉해 관객과 만났다. <귀목: 피의 혼례>는 앞서 소개한 <웨폰> 등과 함께 부국제 미드나잇 패션 섹션에 초청됐다.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로, 베트남 현지 개봉 이후 첫 해외 상영이란 점도 특징적이다. 베트남에서 각별히 인기를 구가하는 호러, 그중에서도 현지 색채가 잔뜩 묻어나는 지역 신앙과 결합한 오컬트란 점이 또한 관심을 모았다.
영화는 19세기 베트남 어느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부 가문은 일대에 명성이 자자한 대 부호 집안이다. 이 집안에는 가주 아래, 그의 아내와 둘째 아들 테 딘(후 비 분), 세 며느리가 많은 종들과 함께 살아간다. 가주에겐 본래 세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는 죽었고, 셋째는 집안을 떠난 지 오래로 둘째 아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다. 가주의 아내 또한 오래 병을 앓으며 두문불출한 세월이 길었다.
▲귀목: 피의 혼례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베트남적 아시아 포크호러
이야기는 어린 신부 냐이(램 탄 마이 분)가 테 딘의 짝으로 시집을 오며 시작한다. 그녀는 시집을 오자 마자 이 집의 독특한 가법에 대해 지도받는다. 보름날이면 외출해선 안 되고, 안주인에게도 인사할 수 없다는 등의 특이한 것들뿐이다. 본래 하지 말라면 하고 싶어지는 게 만고의 진리가 아닌가. 순박한 냐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법을 어기게 된다. 그로부터 가혹한 징벌이 이어지니, 도무지 부 가문의 살아가는 방식은 당대 바깥 세상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다.
영화는 이 가문의 성취가 목신이라 불리는 귀신과의 금지된 계약에서 비롯됐다는 설정에 의존한다. 가주가 그릇된 계약을 맺은 뒤로 성공을 거머쥐었으나, 여러 생명이 그 대가로써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다. 냐이가 진실에 다가서는 한편으로, 테 딘 또한 진상에 다가서며 지난 세대가 만든 부조리한 질서에 새로운 세대가 핍박받는 줄거리가 펼쳐진다.
아시아 포크호러는 베트남 뿐 아니라 태국, 대만 등 동남아 전역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는 장르다. 해당 국가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 서구에 오리엔탈리즘에 기인한 소구력 있는 장르란 점도 긍정적 요소로 평가된다. 각 영화제가 이들 작품을 가져오는 데도 이 같은 설정이 얼마쯤 영향을 미치고 있단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부산국제영화제포스터부산국제영화제
국적과 장르만 본 안이한 선택 아쉽다
다만 그 완성도는 천차만별이다. <귀목: 피의 혼례>도 그렇다. 감독 레반 끼엣의 전작이 꽤나 주목받은 이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타공인 아시아 제일의 영화제라 할 수 있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구태여 소개할 가치가 있느냐 묻는다면 고개를 내저을 밖에 없다.
세대와 신분을 엄격히 구분하고 남녀의 역할 또한 선명하게 나눈 지난 시대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선택한 전개와 결말은 너무나 전근대적이어서 실소가 나올 정도다. 아버지가 맺은 악귀와의 계약을 마침내 해소하는 건 주인공처럼 보였던 냐이가 아니다. 그녀는 철저한 목격자로 남겨졌다 어처구니 없는 결말을 맞이할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통해 강조되는 건 무조건적 모성애라는 식상함이다. 저 멀리서 말을 타고 오는 면벽수련한 아들래미가 있어 모두가 구원을 맞는단 설정은 얼마나 구태의연한가.
며느리들의 최후가 하나하나 전근대적이다. 자식을, 남편을 위해 희생하거나 악녀가 된다. 심지어는 악귀조차 여성의 상이다. 정작 제 욕구를 위해 금지된 일을 저지른 악의 근원인 가주는 어느새인가 그 존재를 잃고서 생존자로 남는다. 가주란 지위 또한 공고하기만 하다. 돌아온 아들의 활약으로부터 구해진 건 핍박받던 며느리들도, 하인들도 아니다.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 또한 아니다. 구태의연한 부 가문의 명예가 복원되고, 가주의 목숨이 구해질 뿐이다. 베트남 영화산업, 그중에서도 떠오르는 호러영화, 다시 그중에서도 포크호러란 것을 제한다면 이 영화에 주목할 가치가 있는가.
탁월하거나 혁신적 작품들 여럿이 부국제 마켓에서 마지막까지 계약이 성사되지 못한 올해다. 그러나 <귀목: 피의 혼례>는 들어와 한국 관객과 마주한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한국 내 베트남인이 많고, 가격을 포함해 위험부담이 낮다는 점, 또 장르적 매력이 그 이유가 됐을 테다. 그러나 한 편으로, 급속히 그 다양성을 잃고 최신 경향을 반영하지 못하며 낡아만 가는 한국 영화판의 오늘이 마음에 밟히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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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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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영화가 뜬다는데... 이 영화는 왜 실망스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