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를 더는 혁신적이라 할 수는 없겠다. 불안정한 사람들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따라가고, 다큐를 연상시키는 기법으로 극영화의 현실성을 극대화하는 방식, 비전문 배우를 전면에 내세우며, 롱테이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선택까지가 하나하나 그렇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 거머쥔 이 시대의 거장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은 어느덧 특징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이란 표현이 더욱 어울릴 정도가 되었다.
스타일은 흉내낼 수 있지만 시선은 그렇지가 못하다. 다르덴 형제를 오늘의 거장으로, 존중받는 작가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들여온 여러 작품 가운데서도 유달리 인기 있는 영화의 감독으로 만든 것은 그저 스타일이 아니다.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 문제를 다루는 태도, 그 완고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자세가 오늘의 그들을 만들었다.
<엄마의 시간>은 다르덴 형제의 신작이다. 올해 있었던 제7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으로, 각본상을 수상했다.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 어느덧 일흔을 훌쩍 넘은 두 노감독의 카메라가 담아낸 주제는 여전히 우리네 현실 가까우나 시선이 닿지 않는 음지, 도움과 관심의 손길이 머물러 마땅한 집을 향한다.
▲엄마의 시간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내 삶도 버거운데 엄마가 돼야 하다니
벨기에 동부의 도시 리에쥬에 위치한 미혼모 보호센터가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가 닿는 곳이다. 이 보호센터는 미혼모 중에서도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한 청소년들을 보살핀다. 요컨대 성인이 되지 못한 십대 중반의 어린 여성들이 저마다의 사정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다. 영화는 모두 다섯 명의 미혼모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비춘다. 이전 한 명의 주인공에게 가까이 들러붙어 그 가장 내밀한 이야기까지를 특유의 영상문법으로 끄집어냈던 다르덴 형제가 이제는 새로운 양식을 택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마치 옴니버스 영화처럼, 다섯 명의 미혼모가 돌아가며 중심에 서는 방식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다 같은 청소년 미혼모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하나하나가 전혀 다른 생김을 가진 얼굴이다. 애인을 붙들려 아이까지 수단 삼고자 하는 페를라(루시 라뤼엘 분)는 제 계획과는 달리 이별을 맞이한다. 아이 아빠는 페를라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제 집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은 상태다. 페를라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그가 느끼는 부담 또한 커져, 둘은 마침내 예고된 파국과 맞이한다. 반면 아이 아빠가 정성으로 엄마를 보살피기도 있다. 쥘리(엘사 호벤 분)의 사례로, 성인이 되려면 몇 년이 더 지나야 하는 어린 나이지만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생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만 둘은 모두 약물중독으로 고생한 이력이 있고, 쥘리가 다시 약물에 손을 대 위험을 겪기도 한다.
아이를 낳고도 모성애가 전혀 생겨나지 않음에 당황하는 소녀도 있다. 제시카(바벳 베어벡 분)는 아이가 오로지 해내야만 하는 일거리로만 느껴지는 것이 저의 결핍 때문이라 여긴다. 다름 아닌 자신이 엄마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길러진 때문이다. 만석의 몸을 이끌고 친모를 찾으러 다니는 제시카는 아이를 낳고서야 마침내 그녀와 대면한다. 저를 없는 양 밀어두고서 리에주에서 새 삶을 꾸린 엄마에게 분노와 그리움,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제시카의 모습이 충분히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누구누구들의 얼굴이란 걸 알도록 한다.
▲엄마의 시간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다섯 명의 어린 엄마, 어떻게든 살아남기
엄마가 무관심한 이들만 청소년 미혼모 보호센터에 발을 들이는 게 아니다. 아리안(자나이나 할로이 분)의 사례가 그렇다. 갑자기 나타난 엄마는 아리안의 삶에 개입하려 들고, 아이를 더 나은 형편의 가족에게 입양 보내려는 아리안의 시도조차 어려움에 봉착한다. 여기에 더하여 나이마(사미아 힐마이 분)는 아이를 기르는 일과 업을 함께 해나가야 하는 버거운 상황에서의 문제를 홀로 맞닥뜨려야 한다.
소녀란 말이 차라리 어울릴 어린 엄마들의 사정은 하나하나가 쉽지 않다. 한국에 비할 수 없이 체계적인 벨기에 리에쥬 보호센터의 관리며 지원에도 엄마가 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건 어찌됐든 이들 다섯 소녀다. 공동생활을 하며 독립을 준비하고, 아이와 저 자신을 감당하기 위해 사회생활을 하는 것, 그 가운데 약물중독이나 가족문제 등 자신을 괴롭게 하는 문제들과 맞서는 것이 하나하나 버거운 과제가 된다. 보호센터와 센터직원들은 아이들이 엄마로서의 책임감과 자립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한편으로, 돌봄과 자립에 필요한 지원을 적절히 감당한다. 그 도움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일어서는 것이 결코 쉽지 않게 그려진단 건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가 언제나처럼 가깝게 다가서 진중하게 문제를 바라보는 덕분일 테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연민하지 않는다. 섣불리 판단하고 비난하거나 거리를 둔 채 쉬운 동정을 보내는 대신, 가까이 다가서 이해하고 응원하려 한다.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를 보는 이의 심정으로 직접 안아들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그 걸음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른, 또 공동체 구성원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냐는 듯.
▲엄마의 시간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사회의 역할, 제도의 지원
가만 보면 이들 각자가 겪는 문제가 곧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섯 어린 엄마의 고난은 하나하나가 이들이 보살핌 받아 마땅한 아이일 적 마주한 사회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제시카의 엄마는 왜 그녀를 보육원에 맡기고 아이가 없는 듯 살아갔을까. 어떻게 쥘리는 어린 나이에 약물에 손을 댔고 아직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나. 이들이 마주한 문제들이 결코 사회로부터 동떨어져 있지 않단 것을, 또 보호센터와 직원들처럼 그럼에도 이들 곁에 등을 기댈 어른들이 존재한다는 걸 영화가 진지하게 비추어낸다.
흥미로운 건 이들 다섯 어린 엄마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모습이다. 인간에겐 어떤 역경에도 일어나고 맞설 힘이 있다는 듯이, 버거운 순간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조차 박차고 일어나 움직거리는 생동감이 영화 가운데 곳곳에서 발견된다. 부모가 되는 일의 버거움 한 편에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의지가 펄떡이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여기나 저기나 인간이란 하나 같이 비슷한 삶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엄마의 시간>으로부터 한국의 모양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래서 필연적이다. 엄마도, 아이도, 인간이 살아가는 모양 자체가 벨기에와 한국이 다르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들춰볼수록 한국이 선진국이란 외면에 전혀 맞지 않는 내실을 가졌음을 깨닫게 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혼인 외 출생아 수는 1만3827명으로 전체 신생아의 6%에 육박한다. 매년 꾸준히 늘어 지난 2020년 6876명에 비하면 무려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역대 최고치다. 그러나 이 수치가 곧 영화에서처럼 불안정한 미혼모의 수를 뜻하지 않는다. 혼인 제도 바깥, 즉 동거에서 출산에 이르거나 정자은행 등을 활용한 자발적 싱글출산 또한 포함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관리가 필요한 청소년 미혼모가 다수 포함돼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한국은 어떤 공적 조사에서도 이들에 대한 추적을 진행한 바 없다.
▲부산국제영화제포스터부산국제영화제
한국의 오늘을 돌아보며
벨기에 리에쥬 보호센터처럼 주거와 생활안정, 돌봄공백을 지원하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단 건 한국 복지의 현실을 보여준다. 생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양육비를 받지 못하는 미혼모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전체의 7할 이상일 것으로 관계 단체에선 추정하고 있다. 최근 여성가족부가 시행한 양육비 선지급제 또한 친부를 인지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그 실효성이 의심된다.
<엄마의 시간>은 다섯 명의 어린 엄마의 삶을 가까이서 비추며 이들의 곁에 알게 모르게, 그러나 분명히 작용하는 사회와 제도의 영향을 확인케 한다. 때로는 긍정적으로, 또 때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며 제도의 존재가 한국 사회 가운데도 분명히 자리하고 있을 테다. 그러나 한국은 미혼모, 심지어 청소년 미혼모의 존재조차 적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복지제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고, 이들이 주거며 돌봄에서 기대할 만한 사회적 지원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
영화에서 다섯 아이 중 희망찬 결말을 맞는 이가 채 몇이 되지 않는단 사실은 엄마가 되는 일과 개인의 고질적 문제를 극복하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하나하나 쉽지 않음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처지의 어린 엄마들에게 어떤 기회를 주고 있는가. 영화의 비교적 희망찬 결말에도 마음 편히 웃고 나올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공유하기
애가 애를 낳았다... 청소년 미혼모의 버거운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