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 이래서 두 번 보라고 하는구나

[리뷰] 영화 <어쩔수가없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어쩔수가없다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알려진 대로 <어쩔수가없다>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의 판권을 따내기 전에 시나리오부터 썼다는 박찬욱 감독 일생의 프로젝트다.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을 배경으로 썼던 원안 <도끼>를 거쳐, 결국 한국에서 제작된 <어쩔수가없다>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줄 때마다 들었던 한결같은 반응은 '시의적절하다'는 감상이었다고 한다.

하나의 이야기에는 유통기한이 있기 마련인데 원작소설이 출간된 1997년부터 박 감독이 처음 관심을 가졌다는 2006년. 결국 영화가 개봉한 2025년에도 생명력을 유지하는 키워드는 기계화, 자동화로 인해 실직으로 내몰린 가장의 비이성적 돌발행동이다. 그런데 우리는 박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 이미 같은 이야기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바로 <복수는 나의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실직으로 궁지에 몰린 청각장애인 류(신하균)은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누나의 수술비를 마련하려다가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한다. <어쩔수가없다>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를 거쳐 선택하게 된 극악한 문제해결의 도구는 각각 살인과 유괴다. 두 경우 모두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짓이지만, 범죄를 통해 노리는 수익의 차이가 박 감독이 <어쩔수가없다>를 어쩔 수 없이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어쩔수가없다

<복수는 나의 것> 이후 20년

2003년에 개봉한 <복수는 나의 것>은 IMF 극복기의 개발도상국을 배경으로 실직이 곧 죽음으로 연결되는 극빈층이 주인공이다. 동진(송강호)의 딸을 납치한 류가 요구하는 건 누나가 신장이식을 받을 수 있는 수술비 2700만 원. 그 과정에서 불법 장기매매 사기를 친 세 명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부주의로 납치한 동진의 딸마저 죽게되지만, 동진이 "너 착한 놈인 거 안다"고 말할 정도로 상황이 꼬인 류의 비참한 상황에는 일말의 동정심이 생기기도 한다.

<어쩔수가없다>는 2025년이 한국이 배경이다.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풍요로운 사회에서 스스로도 "다 이뤘다"고 말하는 만수(이병헌)가 실직으로 잃게 될 조건은 류와 다르다. 정원이 딸린 안락한 2층 전원주택, 부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여가생활인 테니스와 댄스모임, 가족과 같은 반려견 2마리 그리고 넷플릭스 구독. 생존과 관련 없는 문제들이지만 만수에게는 죄 없는 구직자들의 목숨을 빼앗고라도 지키고 싶은 삶의 최저선이다.

생존을 위협받는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지만 중산층이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시대정신이 됐다. 시대정신을 다른 표현으로 바꾼다면 바로 시의적절. 만수의 최종 목표가 문 제지의 최선출인 것도 일맥상통한다. 특수지 전문가라는 경력과 관리직이라는 포지션을 제외하고도 정원에서 도끼로 땔감을 패며 바비큐를 할 수 있고 퇴근 후에는 위스키 한 잔을 즐기는 여유는 만수가 현재 향유하고 앞으로도 기대하는 삶과도 부합한다. 최선출의 SNS를 팔로우하며 일상을 지켜보는 것도 다분히 동시대적이다. 사실 부인과 이혼하고, 놀러 오는 사람 한 명 없어서 이사한 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불을 피워본다는 이면의 고통까지 표백된 가짜의 삶마저도.

가족 혹은 가장이 취업과 관련된 소동에 휘말린다는 표면적 소재가 같아서 자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선진국 중산층의 걱정에서 출발하는 <어쩔수가없다>와 반지하에서 출발한 하층민의 계급 상승욕구가 꺾이고 까마득한 지하의 극빈층으로 몰락할 수도 있다는 공포와 다퉈야 하는 <기생충>의 상황과는 출발선이 다르다. 어느 상황에 심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인 탓에 같은 기준으로 직접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어쩔수가없다

만수를 둘러싼 매치컷과 교차편집

<어쩔수가없다>에서 도드라지는 연출적 특징은 매치컷과 교차편집이다. 만수가 표적으로 삼는 구범모(이성민), 고시조(차승원)과의 관계는 매치컷이 중심이다. 둘은 경력이나 스펙상으로도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지만 만수와 정서적으로도 교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범모는 장기간 실직을 경험하며 알코올중독으로 자멸하는 중에도 최고급 장비로 음악을 감상하는 취미만큼은 놓지 않는다. 동시에 그의 부인인 아라(염혜란)가 연하남과 바람나는 장면을 목도한 후에는 아내인 미리(손예진)에 대한 의심을 키워간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풀볼륨으로 재생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월남전에 참전한 아버지로 물려받은 북한제 권총을 들이민 만수는 깔끔하게 방아쇠를 당겨 총알을 발사하는 대신 범모에게 구구절절한 충고를 날린다. 왜 아내가 시키는 대로 카페를 차리지 않느냐, 마트에 가서 짐이라도 날라라. 목이 아플 정도로 지르는 외침은 아마 같은 처지인 범모에 대한 동정심의 표출이자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충고처럼 보인다. 범모와 아라가 숲속에서 나눈 대화는 이후 미리와의 부부싸움에서 돌림노래처럼 반복된다.

딸(혹은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한 부양의 무게감으로 인해 직업에 대한 갈망이 강화되는 고시조(차승원)와의 만남도 그렇다. 만수는 구두 판매원으로 일하는 시조에게 이런 곳에서 일할 분으로 안 보인다며, 20여 년간 갈고 닦은 전문성을 살리지 못한 처지의 그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시조는 종이 만드는 일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며 직업적 자부심을 갖고 있는 만수의 자긍심을 되살린다. 시조를 살해할 때 만수는 그의 눈을 가린다. 개인의 정체성을 강하게 담은 눈을 가리고 하관만 보이는 그는 시조이자 만수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어쩔수가없다

교차편집은 만수와 가족 간의 관계에서 사용된다. 아라가 쏜 총탄에 의해 범모가 사망하고, 땅에 파묻힌 권총을 찾아 돌아올 때. 만수의 아들인 시원은 친구와 휴대전화를 훔치다가 작동한 경보장치 때문에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각각 자동차와 자전거에 탑승한 두 사람은 뻘이 된 흙밭을 뚫고 집에 도착한다. 배경음이 사라진 화면 위로 산울림의 '그래 걷자'의 첫 소절이 퍼진다. '그래 걷자 발길 닿는 대로 빗물에 쓸어버리자 이 마음.'

만수가 선출을 질식사로 위장하기 위해 땅을 파고 매장하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린다. 시원으로부터 만수의 수상한 행동을 전해 들은 미리의 전화다. 어금니를 뽑아서 입가에 피가 묻고 턱이 부은 만수를 보며 미리는 불안감을 느낀다. 수화기 너머로는 정체 모를 신음이 들린다. 미리는 만수가 사과나무 밑에 묻은 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삽을 들고 땅을 파헤치지만, 결국 아들 시원에게는 통돼지바베큐의 잔해가 묻혀있다고 말하며 다시 흙을 덮는다.

'너 지금부터 하는 나쁜 짓은 다 나랑 하는 거야'라는 미리의 경고가 무색하게 시원은 가족을 돕기 위해 물건을 훔친다. 미리는 무너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브라로 아들의 죄를 타협하려 하고, 가장의 끔찍한 진실마저 사과나무와 함께 묻어버린다. 이처럼 만수의 살인 행각과 동일한 시간에 부인과 아들 역시 범죄를 저지르거나 묵인하며 가족구성원의 암묵적 추인하에 중산층의 삶이 연장된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어쩔수가없다

태양, 파피루스 그리고 문 제지

실직 후 후배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면접기회를 잡은 만수는 미리에게 자신의 단점이 뭐냐고 묻는다. 미리는 곧바로 '식물인간'이라고 답한다. 원예와 분재에 빠진 남편의 취미를 반영한 대답일 수 있지만 종이를 만드는 원재료가 나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심상치 않은 대답이다. 고시조를 죽인 뒤 트렁크에 싣고 와 창고에서 전기톱으로 써는 대신 깔끔한 분재처럼 만들어 커피 자루에 담아 매장한 이후의 전개를 고려해도 그렇다.

'가불은불가(<친절한 금자씨>)', '원전완전안전(<헤어질 결심>)'처럼 언어유희를 즐기는 박찬욱 감독의 취향을 고려했을 때 <어쩔수가없다>에서 제지업계를 대표하는 기업명은 어쩐지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수가 25년간 몸 바친 '태양'에서 발산된 빛과 열은 광합성 과정을 거쳐 나무로 자라난다. 첫 번째로 면접을 준비하는 '파피루스'는 인류가 만든 최초의 종이로 이때부터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다. 만수의 최종 목표는 '문 제지' 입사. 제목처럼 띄어쓰기를 생략하면 문제지로 읽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와 땀을 흘리는 노동자 대신 AI가 적용된 로봇들의 일사불란한 소음만 가득한 제지공장. 재취업에 성공해 공장관리를 맡게 된 만수는 기쁨에 찬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화면은 곧 종이의 원료가 될 나무들이 벌목되는 숲으로 바뀐다. 오로지 종이의 생산만을 위해 키워지고 뽑히고 잘리는 현장. <어쩔수가없다>의 시의적절함은 태초의 태양부터 파피루스에 적힌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는 문제로 완성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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