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약값 보내려 꿈까지 미뤄둔 21살 탈북 여성의 현실

[넘버링 무비 520]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하나코리아>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하나코리아>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하나코리아>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멀리 떨어져 있으니 편지 한 장으로 이렇게 내 마음을 표현할 방법밖에 없습니다."

프레드릭 쇨베르 감독은 오랫동안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온 감독이다. 사건의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보다 대상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변화를 오래 지켜보고 붙잡는 데 더 익숙하다는 뜻이다. 감정을 강하게 고조시키고 밀어붙이기보다 관찰자의 태도로 존재하고 있지만 발견되지 못하는 것들을 포착하는 것이 그가 가진 장점인 셈이다. 대체로 그의 작품 속에는 드라마 대신 사실이, 문제에 대한 해답보다 문제를 위한 질문이 남겨진다. 실제로 그는 인물의 감정이나 내면을 과장된 해석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연출 방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장편 데뷔작인 영화 <하나코리아>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북한을 떠나 남한에 도착한 한 여성의 지난한 정착 과정을 그리면서도,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탈북 서사의 비극이나 구원과 같은 감정적 클리셰에 기대고자 하지 않는다. 대신 낯선 사회의 제도와 일상, 도시의 모습과 개인의 형상이 겹쳐지는 순간들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한 인물이 새로운 사회에 뿌리내려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다큐멘터리적 시선과 극영화의 서사를 모두 통과하는 새로운 프리즘을 통해서다.

02.
혜선(김민하 분)은 북한을 떠나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여성이다. 양강도 지역 출신으로 올해 21살인 그는 16살에 아버지를 여읜 채, 편찮으신 어머니와 노동자 오빠를 북에 두고 자유를 찾아 떠나왔다. 경계선 너머에서는 꿈처럼 여겨지던 해방의 나라가 이제부터 적응해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의 무대가 된 것이다. 실제로 첫 장면부터 주어지는 한국 사회의 인상은 마냥 상냥하거나 친절하지 않다. 무감정하게 내뱉어지는 '절차'라는 대답과 공항과 조사실 내부에서부터 주어지는 질문은 마치 시험처럼 차갑게 던져진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 또한 타이트하기만 하다. 최대한 가까이 밀어붙여서 그의 형상을 잡아낸다거나, 타인의 어깨를 건다거나 하는 식으로 프레임 속에서 인물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으로 제약하는 모습을 보인다. 남한으로 넘어오기 전, 중국 농부의 집에서는 무엇을 했고, 왜 떠나왔느냐는 질문이 주어질 때 그 억압되고 고정된 형태적 구조의 불편함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하나코리아>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하나코리아>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3.
"이제 안전한 곳에 와 있는데도 자꾸 지난날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요."

보편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탈북 서사를 그리고자 하는 감독이 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낯선 사회에 편입한 대상이 반드시 지날 수밖에 없는 배움의 서사를 표면에 드러내는 일이다. 하나원에 입소한 뒤에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 그리고 실제 삶에서 필요한 일들을 하나둘 배워가는 과정은 익숙하지만 낯선, 묘한 감각을 완성해 낸다. 이미 구축된 사회의 제도는 언제나 작동하기 마련이고, 사람은 그 제도에 맞춰야 한다. 또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거의 대부분은 이미 이 제도권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온 존재들이다. 이 차이가 영화와 관객 사이에 묘한 거리감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감독은 이 과정에 메시지나 교훈을 담고자 하지 않으며, 그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매일의 장면으로 치환할 준비를 할 뿐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남북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단절성을 삶의 보편적 가치 가운데 하나인 '분절될 수 없는 속성'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는 탈북자가 남한으로 건너온 순간, 국가에 의해 출신 성분을 조사받는 현실적 부분에서부터 이미 자동적으로 일으켜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모두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독립될 수 없으며, 그 대상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가 형성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혜선이 중국에서 경험한 여러 사실과 북에 두고 온 가족과의 연결성도 마찬가지다. 아픈 엄마의 약값을 보내야 한다는 혜선의 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돈을 벌기 위해 하루라도 더 빨리 남한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꿈이 아닌 일상을 지켜갈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04.
하나원에서 퇴소한 혜선과 친한 탈북 동료들, 봄이(안서현 분)와 숙희(김주령 분)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에서도 감독이 가진 기조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두 인물은 혜선과 함께 하나원의 교육을 받은 이후, 서울에서 노동과 생계를 이어가며 일상의 반복을 공유한다. 이들의 관계는 어떤 극적인 드라마나 명시적 연대가 아닌, 함께 경험한 과거와 지금 지나고 있는 현재의 감정적 무게로 형성된다. 같은 집에서 함께 지내는 봄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숙희도 혜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종의 연대적 감각이다.

다만 적극적인 형태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는 중요하다. 이들의 연대는 긴밀하고 끈끈한 유대감에서 비롯된다기보다, 특정한 상황을 공유하고 서로의 자리에서 내일을 함께 바라보는 현실적인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경험해야 했던 모진 시간들, 그리고 지금 도착한 남한에서 마주하게 된 현실이다. 서로가 가지게 될 각각의 균열에 대해 나서기보다, 그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옆을 지키는 존재로 세 사람은 서 있다. 거창하지 않은 이름의 연대. 서로의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이 관계야말로 혜선이 낯선 사회에서도 무너져 내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된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하나코리아>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하나코리아>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5.
"그렇게 열심히 해서 엄마한테 돈 보내면 마음이 후련해질 줄 알았거든."

이 작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혜선이 엄마에게 쓰는 편지에 대한 내레이션이다. 한 인물이 가진 서사를 극 중에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기능하면서도 그가 가진 정체성을 그대로 투영해 내는 지점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한 사회에 다다른 혜선에게 이 내레이션(의 내용이 포함하고 있는 북한의 가족과 관련한 상황)은 도리어 그가 오롯이 서울에 정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실제로 혜선은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고 엄청난 수수료를 부담하며 브로커를 통해 송금하고자, 자신의 꿈까지 미뤄둔 채로 경제 활동에 뛰어든다.

그가 무엇을 위해 지난한 시간을 견디면서까지 남한에 이르렀는가의 문제를 생각하고, 처음 봄이와 함께 화장품 가게에 들러 치장하던 장면을 떠올려보면, 이 장치는 단순히 극의 드라마적 요소만을 위해 마련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이는 탈북 서사가 전형적인 구원의 문법으로 해석되지 않길 바라는 감독의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자, 실제 많은 탈북민들이 경험하고 있을 분단된 영토와 단절되지 못할 혈연 사이의 가장 어려운 지점이 투영된 자리에 가깝게 여겨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 하는 시간 속의 고단함, 사회의 이질적 존재에 대한 멸시와 차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던 남한의 사정에 대한 현실적 어려움,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해야만 하는 모멸적 순간들이 하나둘 드러나며 현실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든다. 물론 영화는 그 과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이 사회에서 적응해 나가는 과정은 처음 타이트했던 앵글에서 벗어나 조금씩 넓고 유연해지는 시선과 함께 점진적으로 그려진다.

06.
영화 <하나코리아> 속 '하나'는 오래 분열되어 온 영토의 통일을 뜻하는 구호처럼 들리기 쉽지만, 서사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는 그 결과 조금 다르다. 분열된 기억과 균열이 시작된 정체성을 하나로 묶는 일, 그 불가능을 낯선 사회에서 매일 수행해야 하는 한 인물의 현실적 모습을 표현하는 일에 조금 더 가깝다. 혜선이 남한에서 배우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만이 아니다. 떠나온 자신의 정체성과 현재 남한 사회에서의 정체성이 서로 부딪히지 않으면서도 오늘을 살고 내일을 향해 갈 수 있는 수많은 선택이다.

이 영화의 모든 감정적 환기가 '계속되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 파편처럼 흩어진 내레이션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것 역시,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무한히 확인하고자 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작은 바람과 행동 속에서 삶은 그렇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하나가 될 수 없는 사회에서 흩어지지 않는 방법', 어쩌면 영화 <하나코리아>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하나코리아 김민하 김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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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