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뜨거운 영화 한 편이 있다. <토탈 이클립스>. 백 년도 더 전에 살았던 프랑스의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삶을 다룬 불꽃같은 전기영화다. 불과 열여섯의 어린 나이, 스스로를 태워 꿈에 다가섰던 천재적 시인의 삶을 이 영화가 홀린 듯이 뒤따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태양을 좇다 그 열기에 온몸이 타버린 시인은 어느 순간 해바라기 같은 외양을 갖게 된 듯도 하다. 이 영화 <토탈 이클립스>는 내게 전기영화가 갖춰야 할 제일가는 미덕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줬다. 영화가 다루는 인물을 닮아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다.
<토탈 이클립스>의 감독은 아그네츠카 홀란드다. 1948년생으로 올해 일흔일곱이 된 폴란드 출신의 노장이다. 그녀가 마흔일곱에 찍은 이 영화는 랭보와 그의 연인 폴 베를렌의 이야기로, 파격적 연출과 열렬한 연기, 통상적인 전기영화와 달리 격렬하며 전위적이기까지 한 연출로써 호평받았다. 랭보를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바야흐로 성인 연기자로 자질을 인정받았고,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주목해 마땅한 세계적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이후에도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토탈 이클립스> 만큼 대단한 화제를 뿌린 작품은 없었으나, 그 내실 만큼은 부족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그네츠카 홀란드가 특출난 역량을 보인 건 전기영화에 있어서였다. 2006년 <키핑 베토벤>, 2019년 <미스터 존스>가 모두 전기영화로, 그 재능을 확인케 했다.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신작으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섹션에 소개된 작품 <프란츠 카프카> 또한 전기영화다. 아그네츠카 홀란드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거창한 프로젝트'라 불린 이 영화를 보고난 뒤 나는 내가 이제껏 보아온 전기영화의 목록을 수정하게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선호하지 않는 작가의 전기영화,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프란츠 카프카가 과대평가된 작가라 여긴다. 카프카의 유명세야 말해 무엇하랴. 그가 생애 전체에 걸쳐 쓴 단어의 수천 배가 그의 작품을 논하는 데 쓰였다는 이야기가 흔히 들려온다. 한국에서도 카프카의 인기는 대단하다.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인 <변신·시골의사>를 지난 2023년 카프카 탄생 140주년이라 하여 <돌연한 출발>이란 제목으로 외양만 갈아 출판했을 때도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정도다. 그가 친구에게 남긴 편지글 가운데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라는 문장은 독서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문구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카프카의 문학이 과연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대표작 <변신>을 포함하여, 한국에 출간된 여러 작품을 수차례 읽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문학적 성취며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카프카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단 말은 달리 적자면 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의 작품이며 삶에 대하여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한 숱한 평론을 읽고도 나는 도무지 그에 공감하지 못하였다. 불안과 죄책감, 실패와 실망 따위는 카프카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소설이 그를 다루었다 해서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프란츠 카프카>는 내게 놀라운 작품이 됐다. 다루는 인물을 이해하도록 하는 전기영화의 임무를 충실히 소화하기 때문이고, 그 형식부터 내용까지가 지극히 카프카적 시도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며, 인물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있어서도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대신 독자적 시도를 해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용을 넘어 형식에 있어서까지 다분히 자유분방하며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는데, 나는 그 또한 카프카적이라고 느꼈다. 영화가 카프카를, 그 작품세계를 닮아 있다는 뜻이겠다.
영화는 프란츠 카프카의 삶을 다룬다. 생애라고는 하지만 크게 주요하지 않은 소년기를 건너뛰고 단박에 성년이 된 프란츠에게 다가선다. 흔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영화의 시작점에서 프란츠(이단 바이스 분)는 가부장적인 집안의 유약한 장남이다. 그 아버지 헤르만(페터 쿠르트 분)은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아내와 프란츠, 딸들에게까지 걸핏하면 소리를 내지르는 가부장적인 사내다. 그는 유달리 아들 프란츠에게 엄격했는데, 거친 저의 성향뿐 아니라 그를 낳기까지 두 아들을 먼저 잃은 경험도 영향을 미친 듯 보인다.
▲프란츠 카프카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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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일대기
프란츠는 집과 회사를 오가는 것 외엔, 대부분의 시간을 소설을 쓰는 데 보낸다. 작가로 아직 책 한 권도 내지 못했으나 꾸준히 글을 쓰고 언젠가는 세상에 제 작품을 내보이겠단 꿈도 간직하고 있다. 다만 그의 작업을 부모는 영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저 직장일에 충실하고, 가족의 사업에 도움이 되기만 바랄 뿐이다. 그를 기르는 동안 번번이 어긋났던 기대는 어느덧 짙은 실망으로 자리한 듯. 헤르만은 프란츠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어머니 또한 프란츠가 남편의 눈에 들지 못하는 게 편할 리 없다.
영화는 프란츠의 짧은 삶, 고작 마흔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기까지를 다룬다. 결혼에 가깝게 다가섰던 펠리체 바우어와의 관계, 친구 막스 브로트의 굳건한 지지 속에서 작품 활동을 지속해 책을 출간하고, 낭독회에 서는 광경도 이어진다. 부모는 여전히 그를 외면하고, 사랑은 실패하며, 작품 또한 뚜렷한 성취를 가져다주지 못하지만 프란츠는 저 나름의 길을 어찌됐든 걸어간다.
<프란츠 카프카>의 카프카의 삶을 충실하게 재구성한 서사 때문이 아니다. 차별화된 그 형식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대하도록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영화 속 프란츠의 일상 가운데서 주변인들이 카메라를 향해 말하는 순간들이 있다. 소위 제4의 벽이라 불리는 현실과 창작물 사이의 벽을 뚫고서,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를 또렷하게 바라보며 마치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를 하듯이 프란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방금 전까지 프란츠의 인생에서 조연으로 존재했던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통하여 영화는 단방향 서사가 가질 수 없는 풍요로움을 더한다.
또 다른 장치도 있다. 영화는 현실세계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지위와 평가를 알 수 있는 순간을 수시로 내보인다. 프란츠가 집을 떠나 작은 방에 세를 들어 독립하던 순간엔, 좁은 구멍을 통해 그 방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을 보여준다. 이는 그대로 현대 박물관의 풍경으로 이어지며, 이곳에서 관람객들이 과거 카프카의 작업실을 작은 구멍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연출은 영화 내내 수차례에 걸쳐 지속된다. 애인과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던 어느 순간, 프란츠와 애인 펠리체가 서로를 잃어버린다. 두 장소는 얼마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프란츠는 현대로 넘어와 그래피티가 낙서된 벽 앞에 서 있고, 애인은 과거 그 공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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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적 연출이란 이런 것
이밖에도 영화는 프란츠가 살던 시대로부터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오늘로 수시로 넘나든다. 헤르만이 어린 프란츠가 수영을 터득해야 한다며 물속에 빠뜨려 올라올지를 알 수 없던 그 순간으로부터, 카프카가 생전 자주 찾아 수영 후에 일광욕을 했다는 볼티바 강변의 오늘로 이어지는 광경은 꽤나 인상적이다. 이곳엔 프란츠 카프카가 수영을 했다는 표지판이 큼지막하게 서 있고, 관광객들이 가이드에게 돈을 내고 타올을 받아 프란츠가 누웠던 자리에 몸을 누여보는 것이다. 비슷한 설정과 시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영화는 자연스레 지난 시대의 작가 프란츠와 오늘의 관객 사이를 이어내고, 그가 오늘의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평가까지도 내보인다. 현명하고 참신한 시도다.
카프카 문학의 특징적 요소인 현실과 환상 사이의 넘나듦, 부조리며 비현실적 요소의 적극적 수용, 따위를 영화가 그 형식으로 그대로 차용한 점이 각별히 인상적이다. 그저 흉내를 내는 수준을 넘어,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탁월한 연출로써 과거와 현재를 잇고, 제4의 벽을 두드리는 시도 따위가 이어진다. 그는 그 자체로 카프카의 문학적 특징과 성과를 떠올리게 한다. 그를 닮아내는 수준을 넘어 훨씬 더 주도적이고 파격적이라 해도 틀리지가 않다.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방식으로 제 전기영화를 통해 인물을 존중하는 방식이랄까. 나는 전기영화를 대하는 이보다 나은 태도를 알지 못한다.
놀랍도록 섬세하며 탁월한 연출이 여럿이다. 단 하나 더 예를 들자면, 입대를 위해 집을 떠나는 프란츠와 그를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이겠다. 영화는 이를 매우 특징적으로 연출한다. 얼마 전 그가 아버지 머리 맡에 두었던 제 첫 단편소설을 읽고 아버지가 분개한 것이다. 아버지가 프란츠에게 다가와 "속옷만 입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게 나지?" 하며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는 장면은 얼마나 충격적인가. 그러나 프란츠는 제 아픔도 잊고서 "제 소설을 읽어보셨어요?" 하고 기쁨에 젖어 묻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포스터부산국제영화제
더 넓고 깊은 이해를 도모하며
그런데 이로부터 영화는 또 한 번 같은 장면을 반복한다. 이번엔 입대하는 자식을 마치 오늘도 출근하는 자식 보듯 데면데면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 순간 관객은 안다. 뒤의 것이 현실이며 앞의 것은 프란츠의 기대였음을. 그가 얼마나 간절히 아버지의 관심과 기대를 갈구했는지를.
<프란츠 카프카>는 실제 사실에 충실한 서사에 더하여 독자적 해석이 깃든 에피소드와 캐릭터, 극적 효과를 위하여 매만진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형식적 매력을 돋우는 설정이며 디테일 등 여러모로 대단한 전기영화다. 프란츠 카프카를 작가로서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와 같은 이조차 이 작품이 카프카적으로 그의 전기영화를 찍어낸 결과물이란 사실을 알아챌 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카프카를 작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끈다. 그러고 나면 카프카의 작품조차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전기영화의 가장 주요한 목적이 대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그 목적 또한 충실하게 이뤄낸다.
<프란츠 카프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기영화가 됐다. 저 자신의 뛰어난 작품들, <미스터 존스>와 <토탈 이클립스>를 넘어 그녀는 제가 가진 모든 역량을 투입해 카프카라는 인간의 세계를, 작가의 가치를, 그가 갖는 의미를 표현해냈다. 부조리며 우울이라 쉽게 이름 붙여지지만 동시에 그만한 이해를 받지는 못하던 이 작가의 세계가 이를 통해 부피감 있게 되살아난다. 영화가 섬세하게 구축한 디테일한 소재들도 다분히 인상적이다. 좋아하지 않던 작가의 전기영화를 그 반대보다도 훨씬 더 애정하게 된다는 것, 그건 대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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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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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좋아하지 않던 나인데... 그의 전기영화에 매료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