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만수는 왜 기계 아닌 동료를 겨눴을까?

[리뷰] 영화 <어쩔수가없다>

▲ '어쩔수가없다', 기계 대신 인간을 파괴한 AI시대 슬픈 러다이트의 초상 [안치용의 영화리뷰]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요약하면 중년 가장의 재취업기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숨은 메시지는 크다.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는 아내 미리(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중 회사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는다. 만수는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한다. 재취업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다. 1년 넘게 마트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자신이 가장 적격이라고 판단한 자리를 발견한 만수는 재취업을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한다. 영화는 이 결심의 실행을 통해 재취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린다.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이병헌 #어쩔수가없다결말 ⓒ 안치용의 시네마 인문학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요약하면 중년 가장의 재취업기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숨은 메시지는 크다.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는 아내 미리(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중 회사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는다. 만수는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한다. 재취업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다. 1년 넘게 마트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자신이 가장 적격이라고 판단한 자리를 발견한 만수는 재취업을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한다. 영화는 이 결심의 실행을 통해 재취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린다.

슬픈 러다이트

블랙 코미디다. 재취업을 위한 만수의 결심과 그 실행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된다. <어쩔수가없다>는 얼핏 중산층 가정과 중년 가장의 비극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이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당연히 그런 면이 표면에 떠오르도록 연출했지만, 핵심 메시지는 AI와 고도 자동화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정체성과 노동의 위기에 관한 질문이다.

만수의 대응에서 러다이트 운동을 떠올렸다. 역사 속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은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아 가자 분노하며 기계를 파괴했고, 그 기계파괴운동을 역사에서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부른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21세기 영화 속 만수가 기계 대신 자신과 똑같은 처지인 동료 노동자를 파괴대상으로 설정하게 함으로써 영화는 그를 현대의 '슬픈 러다이트'로 만든다. 시스템에 분노해야 할 만수는 오히려 비슷한 역량을 갖춘 노동자들을 제거해야 할 경쟁 상대로만 인식한다. '마이너스섬 게임'의 사회 구조 속에서 일자리가 한정되자 일자리를 줄인 누군가를 향해야 할 분노의 화살을 인간에게 겨눈다.

문제가 같지만 다른 답안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의 러다이트 운동에서 파괴 대상인 기계는 물리적인 실체가 있었고, 따라서 실직의 원인 또한 명확했다. 물론 그때에도 본질적인 원인이 기계 뒤에 숨었으나, 크게 보아 분노의 방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AI에 맞서기는 간단치가 않다. 적이 물리적 형태가 없는 무형의 알고리즘이자 데이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AI의 존재는 편재성이며 무한복제에 입각한다. 기계처럼 구체적인 물리적 실체로 AI를 찾아내 제거할 수 없다. 클라우드 서버에 분산되어 있고,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며, 그 소유권과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

AI가 일자리를 빼앗아도, 만수로서는 분노의 대상을 특정할 수 없게 된 셈이다. 파괴할 기계가 없으니, 만수의 분노는 눈에 보이는 경쟁자인 동료 인간을 향하는 것으로 적응된다. 인간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물리적 실체이다. <어쩔수가없다>는 기계가 아닌 인간을 파괴하는 자기파괴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리며, 극단적인 자동화·효율화 경쟁을 부추겨 인간을 점차 생산에서 소거하고 결국 개인을 파멸로 몰아가는 AI 사회의 합리적 불합리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어쩔수가없다' 스틸사진
'어쩔수가없다' 스틸사진CJ ENM

마르크스와 프롬의 이중소외

만수의 인식에서 그의 노동은 뭉뚱그려 '러다이트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는 회사의 부품이 아닌, 특수 제지 전문가라고 믿으며 대체불가능하다고 확신한 자신의 일을 장인정신으로 대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장을 다니면서도 치열하게 공부해 학사학위를 딸 정도로 자신의 직업을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의 방편으로 끌어올렸다. 교과서에 직업을 정의할 때 언급되는 자아실현. 그의 노동은 곧 그의 삶의 의미이자 자존감의 원천이었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는 그가 쌓아온 모든 것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직업을 자아실현의 방편으로 생각한 만큼 실직은 만수에게 일자리를 잃는 것을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자아실현으로서 노동이 아니라 상품으로서 노동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는 더군다나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상품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상품처럼 상품의 지위를 잃게 된다. 자신이 상품에 불과했음을 상품의 지위를 잃으면서 깨닫는 역설이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 가치가 시장 논리에 의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경험은 만수에게 이중으로 고통과 혼란을 안겨준다. 자아실현의 장인에서 생존을 위한 노동 판매자로 전락하고, 결국 자신 노동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영화가 제시한 것과 같은 기이한 방법론을 선택한다. 노동의 가치가 오직 '쓸모'와 '상품성'만임을 만수는 관객과 함께 실감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카를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지적한 노동 과정과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러한 경제적 소외를, 손에 닿을 듯한 생활의 단면을 통해 보여주면서 동시에 에리히 프롬이 말한 심리적 소외를 드러내는 데에도 집중한다. 실직은 만수뿐 아니라 같은 실직자인 범모(이성민)와 시조(차승원)에게도 동일한 영향을 미치는데, 경제적 위기와 함께 현대 사회에서 상품화한 개인이 상품성을 잃어버리면서 겪는 정체성 혼란과 심리적 고립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르크스와 프롬의 소외를 이중으로 각성한 노동자 만수가 연쇄살인범이 된 연유이다.

중산층이란 신기루

영화는 실직 이후 만수가 겪는 몰락을 섬세하고 코믹하게 묘사한다. 한때 '다 이루었다'고 생각한 중산층의 삶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의 위기로 몰린다. 만수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집마저 내놓아야 하는 상황은 그와 그의 가정의 경제적 몰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집이라는 공간이 거주지를 넘어 중산층의 안정과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반려견까지 내보내야 하는 상황은 만수의 절망을 극대화하고 몰락의 위기감을 극적으로 증폭한다. 실직이 대다수 노동자에게 경제적 빈곤을 초래할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추락과 인간관계의 단절을 동시에 가져온다는 사실을 만수의 사례를 통해 영화는 재삼 검증한다. '다 이루었다'는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연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어쩔수가없다>는 만수 개인의 비극을 통해 중산층이라는 우리 사회의 허상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중산층의 상징인 집을 지키고 애완견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재취업을 시도하고 온전히 그 목적에 집중해 과정에서 추악하고 비도덕적인 선택을 서슴지 않는다. 풍자이기에 영화적으로 뾰족하게 그렸을 뿐 만수와 미리(손예진) 부부의 행위는 중산층이란 신기루에 매달린 수많은 현대인이 탄탈로스적 비극과 무기력의 축도이다.

만수는 재취업에 성공하고 가족과 집을 지킨다. 애완견도 되찾는다. 이러한 '해피엔딩'은 정상적인 노력만으로는 개인의 행복과 존엄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는 통렬한 비판이자 풍자이다.

 '어쩔수가없다' 포스터
'어쩔수가없다' 포스터CJ ENM

블랙 코미디

영화가 블랙 코미디가 된 것은 그러므로 불가피했다. 박찬욱 감독이 높이 평가해 이정현의 캐스팅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이 영화도 정색하면 어처구니없는 작품이 된다. 비극적인 서사 속에서 박 감독 특유의 풍자와 유머는 아이러니를 극대화한다.

벼랑 끝에 몰린 가장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극단적 선택에서 영화는 도덕적 딜레마를 생략한다. 전통적인 스릴러나 범죄 영화에서 주인공은 범행 후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파국으로 치닫곤 한다. 이 영화의 만수에게 도덕적 갈등은 사실상 없는 것으로 그려지고, 아내 미리 또한 남편의 행위에 순순히 내조한다.

이때 부부가 감정적 동요를 겪지 않는 것으로 그림으로써, 이들의 행위가 도덕의 잣대로 판단될 수 없는 생존의 영역에 놓여 있음을 암시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만수의 행동을 개인의 일탈이 아닌, 사회 시스템이 개인에게 강요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박 감독의 전언을 담기 위한 장치이다. 딜레마게임의 해가 게임 참가자 모두의 손실이듯, 마이너스섬의 사회 구조가 누군가의 몫을 빼앗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영화는 너무나도 친절한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만수 부부의 행위를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중산층의 삶을 지키기 위해 인간 존엄성과 인간 본질마저 포기해야 한다는 전개는 이미 다가온 AI시대의 러다이트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자는 질문이다.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대중예술에서 아이러니를 성공적으로 사용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만수가 사수한 집에는 새롭게 사과나무 하나가 심겨 있다. 사과나무라는 상징과 비밀을 공유하며 다시 행복해지는 가족의 모습은 깔끔한 영화적 상상력이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재취업 후 만수가 일하는 모습은 박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를 압축해 놓았다.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세상에서 어떤 삶과 어떤 인간상을 모색해야 할지 블랙 코미디 안에 묵직한 담론이 담겼다. 당연히 박 감독이나 영화가 답을 갖고 있지는 않다. 쉽게 하는 말로, 늘 그랬듯 우리가 답을 찾아낼까?

안치용 영화평론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이병헌 손예진 안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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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세계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