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죽음 관련 단서 찾아다니던 남편이 마주한 것

[넘버링 무비 518]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미로>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미로>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미로>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막상 찾고 나니까 왜 찾았지 싶은 거예요. 왜 그랬을까? 뭐 때문에?"

탐정 사무소에서 일하는 희미(위지원 분)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아버지의 사망을 무연고자로 처리한다. 오래 교류가 없던 그를 찾은 이후 떠맡게 된 절차다. 마지막으로 지냈다는 좁은 고시원 방을 찾지만, 정리할 만한 유품도 특별히 없다. 아버지가 읽던 책 속에서 어린 자신의 사진을 하나 발견하게 될 뿐이다. 그날,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은 한 남자가 사무소로 찾아온다. 영문(고경표 분)이다. 사고를 일으킨 남자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의뢰하고자 한 것이다. 소장은 이를 거절하지만, 방금 일을 그만둔 희미가 자신이 하겠다고 한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된 신선 감독의 영화 <미로>는 제목처럼 관객을 인물의 서사 속에서, 신과 신 사이에서 헤매게 만드는 작품이다. 아내를 잃은 뒤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남자 영문,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몇 겹의 인물 관계와 기억의 잔해는 처음부터 분명한 이야기를 내어주지 않는다. 직선적이고 정확한 설명 대신, 인물의 감정과 파편적인 사건의 정보를 드러내며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만, 그 혼란이 무의미하게 전시되고 있지는 않다. 고경표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영문이라는 인물, 그가 겪는 내면의 어지러움이야말로 이 영화의 구조이자 정서의 뼈대와 같아서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미로>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미로>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2.
사실 이 영화는 초반부에서 중반부로 이어지는 시간 동안 어떤 극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결합하지 못할 극의 조각들을 하나씩 제시하는 행위에만 몰두한다. 아내를 잃게 만든 남자 상기(류경수 분)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영문의 이야기와, 곁에서 그를 돕는 희미의 서사, 이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영문 가족의 시간이 파편처럼 떠다닐 뿐이다. 중간중간 흑백으로 제시되는 아내의 생전 모습과 그에 대한 기억도 그중 하나다.

그런 이야기들을 겉돌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감정적 긴장이다. 인물 사이의 관계나 영문의 내면 상태, 의뢰 대상이 가진 진실과 같은 자리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감춰져 있기에 관객들은 정보를 제한당한 상태로 스크린 앞에 머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영화 <미로>가 가진 유일한 단점이기도 하다. 양면성의 그림자다. 줄거리 중심의 요약 콘텐츠와 스킵(Skip) 문화가 지배적인 요즘 시대에 이 작품이 가진 극의 속도는 꽤 답답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중반부 이후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진실의 실마리들은 그동안 쌓아온 감정의 지층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층계를 하나씩 파헤치는 방식이 아니라, 절단면 전체를 한 번에 보여주는 식이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 내면의 균열과 방황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달리 말하자면, 신선 감독의 분명한 연출 의도가 깔린 상태에서 쌓아 올려진 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03.
"야 이 사람아, 해도 정도껏 해야지. 세상에 돈이면 단 줄 아나? 사람한테 이러믄 안 되는 기라."

이 영화에서의 기본적인 대결 구도는 역시, 피해자의 가족인 영문과 가해자인 상기의 가족이 된다. 이들 사이에서 대립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건에 대한 정확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영문이 상기를 찾고자 하는 까닭과도 같다. 하지만 정보의 공백 하나는 우연치고는 꽤 밀도 있는 사건 하나를 완성해 낸다. 상기의 부모가 운영 중인 펜션을 찾은 영문 무리의 난동에 의한 갈등이다. 자신들이 묵은 펜션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이들을 찾아온 상기의 아버지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화를 낸다. 보상금 명목의 돈을 꺼내 드는 영문에게는 돈이면 단 줄 아느냐며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말 한마디는 반대로 그의 아들인 상기에게로 향할 수 있다. 영문이 알고 있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단서 몇 가지. 블랙박스 영상에 소리가 모두 제거되어 있었다는 것과 심지어 그 영상조차 받을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중요한 장면 모두가 모자이크 작업이 끝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의 합의는 자의적 동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가족 모두가 힘들어하는 상황을 이기지 못해 다다르게 된 결론이었다는 점도 함께 드러난다. 이 모든 사후(事後) 과정이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는' 일에 해당되는 셈이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미로>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미로>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4.
"이거 제가 죽인 걸까요? 도대체 왜 뛰어들었을까 저도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도대체 왜."

이후 영화는 영문과 상기의 대면을 주선함과 동시에 그동안 모아왔던 조각을 조립한다. 상기의 고백은 합의의 과정에서 감춰져 있던 사실과 연결되고, 그의 의문은 다시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흑백 영상 속의 인물 심리에 가 닿는다. 이 자리에 이르면, 영화는 그동안 정확히 양분되던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근원적인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과, 그 사람으로 인해 상처 입은 존재만이 명확히 남겨질 뿐이다. 왜 이렇게 되어버리고 만 것일까? 하는 질문과 함께.

영화 <미로>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는 역시 영문 역을 맡은 배우 고경표다. 그는 최근 다양하게 모습을 드러냈던 예능에서의 이미지와 달리, 하나의 서사를 오롯이 이끌어갈 힘과 이미지가 있다는 걸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증명한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 어딘지 모를, 먼 곳을 허망하게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극 전체의 환기를 다시 한번 움켜쥐며 감정적 여운을 마지막까지 느낄 수 있게 만든다. 함께 남겨진 마지막 대사가 오랫동안 마음속을 맴돈다.

"마지막으로 웃어 본 게 언제예요?"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미로 고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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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