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엄마의 시간>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03.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미혼모 보호센터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장 먼저 바라보아야 할 부분이다. 국가와 제도에 의해 '보호'가 주된 목적이 되는 장소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서로 떨어져 있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고 윤리적 교류가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다섯 인물의 사건이 마치 옴니버스식의 개별적인 구성이 아니라, 일상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공동체, 혹은 연대의 공간과 시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 속에서의 개별성이란 각각의 서사가 멀리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 속에서도 서로가 가진 감정과 리듬이 제각각인 것에서부터 획득되는 요소다. 이는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의 단일한 서사로 일반화하는 것을 방지하고, 미성년자라는 대상의 모습을 다양한 얼굴로 마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다양성은 다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한 조각의 형태로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
하나가 더 있다. 보호시설이라는 공간이 가진 두 가지 측면을 인물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부분이다. 이 공간은 보호와 감시의 양면성을 갖는다. 입양 절차에서 릴리를 지원하던 장면이나 나이마가 좋은 소식을 전하기까지 받았을 도움과 같은 것은 보호의 측면에 속한다. 반면, 페를라가 3일이 넘게 아이를 방치하고 보호센터 밖을 배회하는 동안 어린 노에와 분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모습은 감시의 측면에서 비롯되는 절차다. 이곳에 머물고 있는 미혼모에게는 집이면서도 집이 아닌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런 불완전성은 인물들이 스스로의 결정을 찾아가게 되는 동력의 근원이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각각의 장면이 여기에 속한다.
04.
"엄마가 노력할게. 아가야 널 위해서."
다섯 가지나 되는 경우의 미혼모 서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영화 <엄마의 시간>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낡고 구태의연한 연민으로 극중 인물 모두를 피해자의 도식 안으로 밀어 넣지 않고 있어서다. 다르덴 두 형제 감독은 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장면을 제시하고 그 위에서 자립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마련하고자 한다. 물론 입양을 보내고자 결심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아리안이나, 2년 가까이 약물을 멀리하고도 단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쥘리의 모습처럼 (그 외에도 더 있다.) 모든 선택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선택의 권리를 감독이 손에 쥐고 흔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그들 모두를, 아니 같은 처지에 놓인 이 시대의 모든 이들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앞서 이야기했던, 수평적으로 놓인 다섯 인물의 서사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수직적으로 놓인 엄마들 사이의 서사 또한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이 영화는 분명히 보여준다. 영화의 타이틀인 '엄마의 시간'이 단지 다섯 인물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엄마와도 얽히고 엉켜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원제는 'YoungMothers'이기에 지금 이 문장의 해석은 영화제 타이틀에 기댄 의역에 가깝다.) 실제로 그렇다. 부모의 폭력이, 오랜 약물의 시간이,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한 선택의 결과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엄마와 딸의 관계가, 그 딸이 다시 엄마가 되고 난 이후 다시 만들어진 엄마와 딸의 관계가 서로 엉켜붙어 쉽게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엄마의 시간>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5.
"너 혼자 아니야.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영화의 후반부에서, 인물들의 어떤 행동이 하나씩 이루어질 때, 줄리는 남자친구 딜란과 아기 미아와 함께 중학교 선생님을 찾아간다. 증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인데, 이 장면에서 다르덴 형제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L'Adieu'를 차용하며 시간의 의미를 재정의하고자 한다. 이별로 읽히던 엄마의 시간을 기다림으로 전환하면서 오늘을 버티기 위한 구체적 행위로 바꾸면서다. 이제 영화에서 현실의 상황과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이별로 읽히지 않는다. 아이를 떠나보낸 아리안이 18세가 되는 해에 보내질 편지를 쓰고도 무너지지 않는 것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과정을 통해 '시간'은 소녀가 엄마가 되게 만들고, 다시 그 소녀들의 공간을 공동체와 연대가 되도록 한다.
다르덴 형제는 이번에도 시간의 단면을 응시하며 비난과 연민 사이에 놓인 윤리를 기억해 내고자 한다. 완벽하지 못한 제도와 온전한 존재일 수 없는 개인의 미완을 결코 실패로 단정 짓지 않고, 그들의 모습이 끝내 멈추지 않도록 지켜본다. 모두의 삶은 그렇게 느리지만 분명하게 나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누구도 완전히 구원받을 수 없고, 끝내 절망 속으로만 던져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두 감독이 계속해서 하고자 하는 말은 희망이 아닌 지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시작될 엄마의 시간은 분명 이전보다는 조금 더 나을 것이다.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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