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선생과 연애에 임신까지, 여고생은 어떤 선택 하게 될까?

[넘버링 무비 516]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지우러 가는 길>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지우러 가는 길>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지우러 가는 길>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애초에 유부남인데 뭘 어쩌려고 그랬냐?"

학교 탈의실 한편에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는 학생이 있다. 아직 티가 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제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학생이 한참이나 어루만질 부위는 아닌 것 같다. 기숙사 룸메이트로 불법 액상 담배를 만들어 팔고, 밤마다 현금을 건 게임이나 하는 경선(이지원 분)이 오히려 더 학생다워 보일 정도다. 윤지(심수빈 분)는 담임선생 종성(김의황 분)과 비밀 연애를 하다 임신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열흘이나 연락이 닿지 않고 학교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를 원치 않던 종성과 달리, 자신에게도 가족이 생기길 바랐던 윤지는 이제 아이를 지우기만 하면,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불법 약을 구하고, 동물병원을 찾아 중절 수술을 시도한다. 그 곁에는 경선이 함께다.

유재인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지우러 가는 길>에는 한 남자의 존재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관객은 끝내 실질적인 그의 모습을 마주할 수 없게 되는데, 이 부재는 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자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함의하는 장치다. 남성성의 무책임함과 미성년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불균형, 그리고 일그러진 성 윤리다. 그의 부재 속에서 상대인 윤지는 자신의 몸과 미래를 홀로 감당해야 하고, 카메라는 그 모습을 뒤따르고자 한다.

02.
이 영화가 남성의 부재를 다루는 면모 가운데 가장 시선이 끌리는 것은 끝내 어떤 해명이나 구실 없이 사라지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기보다는 남겨진 여성, 특히 윤지의 선택과 감정을 극의 전면에 내세우고자 한다. 이렇게 서사적 주체를 이동시키는 선택만으로도 피해자로서의 인물의 그림자는 일방적으로 소비되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도리어 그 위에 사회가 외면해 왔던 문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윤지라는 인물의 자리를 좁힘으로써 세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평범한 학교생활을 보내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을 때마다 잡아내고 있는 부분이 하나, 학교 주변에 전단을 뿌리고 현수막을 설치하는 일도 모자라 교실 안까지 들어오는 종성의 부인 민영(장선 분)의 역할을 축소하지 않는 것이 또 하나다. 평범한 학생의 자리에도 오롯이 서 있을 수 없고, 사랑하는 감정을 느낀 대상의 곁에도 설 수 없는 인물에게 새 생명을 잉태하도록 만드는 것. 감독은 이 같은 구조를 통해 윤지의 선택이 아닌, 그 선택 위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행동에 관객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그런 두 사람이 처음 통화를 하며 각각의 이유로 종성에 대해 묻는 장면은 초반부에서 중요한 장면으로 자리한다. 두 사람 모두 그를 찾고 있는 상태는 동일하지만, 방식도 이유도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다. 민영은 윤지에게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다시 윤지가 민영에게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되묻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 장면의 존재로 인해, 영화 <지우러 가는 길>은 청소년 임신이라는 문제를 단순한 사회 문제로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도덕적 프레임이나 교훈적 메시지로 획일화되는 것으로부터도 피할 수 있게 된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지우러 가는 길>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지우러 가는 길>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3.
"선생님도 애를 낳고 싶었대. 내가 지금 낳을 수 있잖아. 나는 가족 있으면 안 돼?"

그 의미가 청소년 임신이라는 소재로부터 회피하거나 눈을 돌린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낙태하기만 하면 종성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는 윤지의 선택과 그 과정은 오롯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낙태하기 위해 경선의 돈을 훔칠 수밖에 없는 경제적 문제, 불법 약으로 시도한 낙태가 실패하며 하혈과 함께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던 경험, 심지어 누군가 동물병원에서 낙태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기까지의 과정 모두가 여기에 속한다.

소문으로는 새벽에 간 등산에서 실족해서 세상을 떠났다는 종성의 장례식장을 찾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식적인 낙태 수술에 필요한 100만 원을 구하기 위한 궁여지책. 조의금을 훔치러 간 자리에서 아내 민영을 만나게 되는 윤지는 출산이 무서워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했던 게 유일한 갈등이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에 대한 후회인 셈이다.

04.
한편, 내내 그런 윤지의 곁을 지키는 경선의 존재는 크진 않지만 영화의 중요한 균형추로 작동한다. 어려운 선택 앞에 놓인, 아니 어려운 현실에 놓인 인물의 곁에서 묵묵히 함께 있어 주는 존재다. 다만, 그는 어떤 선택을 재촉하거나 대신하지 않으며 보호자가 아닌, 함께 나아가는 존재로서의 연대에 해당된다.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함께 머무르는, 불법 약으로 낙태를 시도한 이후 고통스러워하는 윤지의 곁을 지키는 등의 장면을 통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하나가 더 있다. 어린 시절 싱글맘으로 경선을 낳고 지금껏 키워온 그의 어머니다. 그는 자신이 엄마의 인생을 망친 것 같아 너무 속상하다는 경선에게, 가진 것은 실수였지만 낳겠다는 건 결심이었고, 세상에서 제일 잘 한 일이었다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영화가 위성 사건에 불과한 이 장면을 굳이 비추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종성과는 무관할 윤지의 선택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남성의 부재를 헤매는 이유가 윤지와 민영이 달랐던 것처럼, 출산에 대한 이유 역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일 테니까.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지우러 가는 길>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지우러 가는 길>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5.
"선생님이 저보고는 지우라고 했는데, 제가 욕심을 부렸어요. 저도 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가족 같은 거. 죄송합니다. 늦었지만."

영화는 마지막까지 극의 어떤 자리 하나도 미화하고자 하지 않는다. 윤지는 윤지대로, 경선은 경선대로, 또 민영은 민영대로 자신이 선택한 일들에 대한 결과와 대가를 감수하도록 하면서다. 윤지의 걸음이 어떤 결말에 도달하게 될지 정확하게 보여주기보다 그 과정에서 겪은 감정과 선택의 무게를 쉽게 지우지 않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지우러 가는 길>은 그런 방식을 통해 하나의 사건이 아닌, 우리 사회가 외면해 온 여러 질문을 이야기 속에 남겨두고자 한다.

임신이라는 사건을 두고 윤지가 경험하게 되는 불안, 종성의 잠적, 그리고 주변 어른의 부재는 다시 한번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덮어왔는지 잘 보여준다. 회피하는 이들과 무관심한 사회, 그리고 제도적 장벽이 한데 얽히며 만들어낸 복합적 현실이 이 작품 속에 녹아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지우러가는길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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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