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스틸컷
넷플릭스
그리고 오빠에 가까이 있던 인물, 운명처럼 오빠와 같은 이름을 가진 김상학. 그리고 채팅 속 닉네임 '오멩달'.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상연이었고, 그는 몰래 흠모하며 열렬히 뒤를 쫓았다. 상연은 끝내 자존심을 굽혀 은중에게 양보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제발 만나지만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상연은 결국 은중의 기획안을 빼앗아 자신의 영화사를 세우고, 두 사람은 완전히 등을 돌린다.
이젠, 은중의 마음으로 넘어가보자. 가진 거 없고 반지하 단칸방에서 가난했고, 그럼에도 성정이 너른 덕에 아무것도 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은중은 엄마의 우유 배달을 종종 거들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난생처음 아파트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정갈한 살림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집. 은중이네 형편으로는 도저히 꿈꿀 수도 없는 공간. 엄마가 배달 구역을 따내기 위해 경비실에 들러 웃음을 건네고, 빈집 청소까지 도우며 눈도장을 찍은 덕분에 은중이 겨우 한번 들어가본 곳.
그런 곳에 사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공부도 잘하고 반장까지 맡은 전학생, 상연의 집이었다. 상연에게는 은중에게 없는 아빠가 있었고, 또 아빠 없는 자신을 눈물로 위로해주던 선생님 같은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상연의 오빠, 천상학이 있었다. 은중이 우연히 상연의 집에서 마주한 그 오빠는, 그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 사진 동아리에서 은중은 뜻밖에도 다시 상연을 만났다. 어린 시절 이후 멀어졌던 두 사람이 캠퍼스에서 재회한 것이다. 살림이 나아지고 형편이 조금씩 안정되어 웃음을 되찾은 자신과 달리, 상연의 삶은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각박해진 듯 보였다.
어릴 적 자신이 살던 남루한 반지하 방을 떠올리게 하는 단칸방에서, 상연은 의외로 환하게 웃으며 은중을 맞아주었다. 낡은 프라이팬에 정성껏 볶아낸 멸치를 내밀며, "맛 좀 보라"며 젓가락을 건네는 모습은 그 시절과 다름없이 씩씩하고 따뜻했다.
은중은 내심 걱정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고했던 그 마음이, 고단한 현실 앞에서 혹여 힘들지 않을까. 그러나 눈앞의 상연은 달랐다. 힘든 살림살이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세상에 맞서는 듯 차분하고 묵묵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다행스럽고, 또 놀라울 만큼 눈부셔 보였다.
은중은 상연이 참 좋았다. 유년 시절을 함께했고, 많을 것을 나눴고, 성인이 되고 나서 또 이렇게 우연히도 필연처럼 마주쳐서 다시 이어진 이 인연이 참 소중했다. 멋지게 해내는 결과물을 보면서 자신답지 않게 질투가 샘솟기도 했다.
언제나 뭐든지 뚝딱 잘해내는 상연이, 멋지고 부러워 가끔 스스로 못나게 느껴지게 하는 친구, 그래서 자신을 더 성장시키는 원동력 같은 상연이. 상연은 은중에게 질투와 동경, 열등감과 애정을 한 몸에 안겨주는, 친구였다.
마지막 동행
▲은중과 상연넷플릭스
은중이 구상했던 청춘 멜로 작품을 상연은 빼앗아 자신의 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발표했다. 상연이 차갑게 내민 계약서 앞에서 은중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종이를 찢어버렸다. 계약도, 돈도, 그런 알량한 합의 같은 보상 없으니, 차라리 끝까지 나쁜 년으로 남으라는 듯이.
동경과 질투, 그리고 애증이 스무 살을 지나 서른을 채우며 두 사람을 갉아먹었고, 결국 돌이킬 수 없이 멀어졌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관계는 끊어졌고, 이제 마흔셋. 은중에게서 빼앗은 작품으로 유명한 감독이 된 상연이 영화제 시상식에서 은중을 언급하며, 은중에게 연락해 두 사람은 마침내 다시 마주 앉는다.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감정 탓에, 이 만남은 껄끄럽고 불편하기만 했다. 그런데 상연이 돌연, 스위스로 함께 가달라는 뜻밖의 부탁을 꺼낸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동행.
한때 누구보다 자존심 세고 고고하던 상연이, 어째서 그 어려운 마지막 부탁을 하필 자신에게 했을까. 그 질문이 은중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그는 상연과 나누었던 분명하면서도 이미 케케묵어버린 추억과 기억들을 하나하나 뒤집어보며, 글로 다시 풀어내기 시작한다.
둘은 죽음을 앞에 둔 자리에서 그동안의 마음들을 느리게, 그리고 길게 나눈다. 말기 암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상연.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평생 지고 살아온 긴 죄책감이었다. 그 고백을 들으며 은중의 마음은 쓰라렸다.
결국 은중은 상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함께 스위스로 향했다. 죽음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꿋꿋해 보이는 상연과 달리 무너져 내린 건 은중의 마음이었다.
상연은 말한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내했던 자신의 오빠와 엄마도 자신처럼 이렇게 스위스에 손잡고 가서 좀 더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고 싶었다고. 모질지 않은 이가 모진 마음을 끝끝내 품고 사느라 천벌을 받은것 같다는 상연이의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하필이면, 스위스의 문은 왜 파랑인 걸까. 은중의 상연의 손을 꼭 잡는다. 의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안락사의 레버를 당기는 상연의 맞은편에서, 잠에 취해 죽음으로 스러져가는 상연의 이마를 마지막으로 짚으며 은중이 속삭인다.
'고생했어 상연아. 잘 가. 다시 만나 우리.'
삶은 언제나 모순과 이율배반으로 짜여 있었다. 선망과 원망이 한자리에 피어나고, 애정과 증오가 한 몸처럼 얽히듯, 은중과 상연의 시간 또한 그렇게 꼬이고 풀리기를 반복했다. 때로는 동경이었고, 때로는 질투였으며, 끝내는 죽음마저도 함께 걸어가야 했던 인연이었다. 누군가의 삶에 박힌 못처럼 아프고 날카로운 기억일지라도, 그 상처가 곧 존재의 증거가 되듯이.
<은중과 상연>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과 미움, 선망과 원망, 그 모든 모순이 얽힌 실타래 같은 인생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끝내 붙잡고 기억할 수 있나.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단정한 기획력, 고여있는 단어들.
이 기자의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