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을 다친 후 계속 비명소리가 들리는 택배기사

[넘버링 무비 514]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사라지는 세계> 외 1편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노이즈 캔슬링>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노이즈 캔슬링>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1.
<노이즈 캔슬링>
한국 / 2025
감독 : 최지혜
출연 : 석희, 이세인

"저기 혹시 비명 소리 같은 거 못 들으셨어요?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 들렸는데."

미주(석희 분)는 밤마다 소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택배 기사로 일하던 중 팔을 다치고 난 이후 들리기 시작한 비명 소리와 쇳덩이가 떨어지는 등의 소음은 점점 더 심해져 간다. 윗집에서도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하고, 경찰을 불러도 도리어 신고자인 그의 의도를 의심할 정도로 주변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현상. 겨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신과 같은 소리를 듣는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그가 주장하는 원인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최지혜 감독의 영화 <노이즈 캔슬링>은 일상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소리가 인간의 감각과 심리를 가르는 경계로 작동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주인공 미주의 내면이 외부의 소리와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긴장과 불안은 단순히 공포 장르의 장치로 읽히기보다, 현대인이 감각적 과잉 속에서 어떻게 고립되고 침묵 속에 갇히게 되는지를 드러내는 사회적 은유로 해석된다. 영화 전체에서 그려지는 소리의 존재와 부재 양가는 관계의 균열과 제도의 무관심, 그리고 인간 내면의 고립감을 차례로 드러내며 극을 긴장 속으로 이끈다.

미주는 지금 일하다가 다치거나 쓰러진 기사들과 함께 집단 소송 중에 있다. 팔을 다친 순간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소음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산재 처리 문제로 고통받는 한 노동자의 현실, 제도의 느린 대응과 무관심 속에서 힘을 잃는 목소리의 상징이다. 하지만 미주는 온 집을 밀폐시키고 두 귀를 테이프로 감싸는 등 그 소리를 차단하려 애쓰며 점점 더 폐쇄적인 공간으로 숨어든다. 그런 행위는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립을 심화시킨다. 고의적으로 청력 일부를 손실시켜 민감성을 떨어뜨리는 약물 치료를 받은 후, 일시적으로나마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피해자인 이상, 소음과 고요는 서로 다르지 않은 현실의 아이러니가 될 뿐이다.

귀를 막고 감각을 저하시키는 약을 먹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재 문제가 채 해결되기도 전에 미주를 관리했던 매니저는 하루빨리 업무로 복귀했으면 한다는 연락을 해온다. 배송 기사들이 개인사업자가 아니기에 산재 처리 대상이 아니라는 냉정한 대답도 함께다. 결국 미주는 회사가 제시한 위로금 명목의 400만 원이 작성된 공상 합의서에 서명한다. 이제 회사는 사고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게 되지만, 그의 왼팔에는 흉터 하나가 선명하게 남았다.

서로 연결되는 소재가 몇 가지 있다. 미주와 함께 집단 소송 중이라는 기사들. 1년 전부터 소음을 듣기 시작했다는 사람. 영화의 후반부에서 미주가 만나게 되는 모스(김소은 분)라는 인물. 길에서 마주친 또 다른 배송 기사. 그리고 위로금을 받고 잠든 날 밤에도 끊임없이 들려오던 소음.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같은 문제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 같은 방식으로 지나간 사람의 자리에 미주가, 이제 비워질 미주의 자리에 또 다른 기사가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가 바라보는 이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산재 처리를 받을 수 없는 구조적 문제와도 분명히 연결된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사라지는 세계>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사라지는 세계>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2.
<사라지는 세계>
한국 / 2025
감독 : 임진환
출연 : 이정희, 강성용, 양진호, 유찬희

"우리가 준비할 장면은 여기까지입니다."

임진환 감독의 영화 <사라지는 세계>는 스무 살 갓 넘은 현진(지연우 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 죽음을 단순히 육체의 종말로 다루지 않는다. 현진의 마음 속에서 살아온 사념체, 오퍼레이터들의 세계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들은 그의 무의식이자 내면의 조각이다. 마치 작은 극단처럼 현진의 인생을 재연하고 편집하며, 그 가운데 어떤 순간을 마지막으로 남길지 고민한다. 주마등이 될 순간을 고르는 일이다. 때문에 영화 중간중간 삽입되는 오래된 영상은 단순한 플래시백으로 남지 않는다. 오퍼레이터들이 찾아 모아낸 기억이자 시간의 아카이브다.

이 아카이브는 한데 모여 한 인간의 정체성을 이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주마등은 그래서 단 하나의 뾰족한 사건이나 기억, 인생의 클라이막스 장면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자신을 어떤 이미지와 감정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는가에 대한 은유적 장치가 될 수 있게 된다. 극 중 사념체들은 곧, 이 선택이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그 무력감 속에서 삶이 지닌 여러 면모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죽음은 상실이 아닌, 삶의 총합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반영이다.

영화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단순한 소멸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사념체들이 그의 꿈 속에서 고르고 살피는 영상은 모두 현진의 기억이자 지나온 시간의 합이다. 이들은 현실과 무의식 사이에 놓여 있으며, 삶이란 이런 기억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물론 죽음의 순간에는 그 기억조차 유지될 수 없다. 존재의 유한성을 이 사실이 정확히 못 박는다. 육체는 물론, 기억과 감정,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에 살았던 자아의 조각들(오퍼레이터) 모두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표현은 사념체들의 시선이 냉정하면서도 연민을 품을 수 있으며, 한 개인의 삶이 사라져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만든다.

결국 이 작품이 그려내는 것은 존재의 해체 과정에 가깝다. 죽음은 개인의 종말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그를 구성하던 세계의 소멸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를 비극적으로 다루지 않고자 한다. 도리어 인간 존재가 기억과 시간, 관계라는 종국에는 덧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마주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 감독의 태도다. 임진환 감독은 꿈과 현실, 주마등과 기억을 오가는 장치를 활용하면서도, 삶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과장하거나 감상적으로 흐리지 않는다. 그런 태도 위에서 우리는 여러 쇼트를 지나 '우리가 무엇으로 구성되고, 어떤 자리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노이즈캔슬링 사라지는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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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