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의 기쁨? 남편에게 임신 밝히지 못한 아내의 속사정

[넘버링 무비 513]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 휴먼 리소스 >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휴먼 리소스>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휴먼 리소스>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엄마가 느끼면 아기도 느낍니다."

시작과 함께 수정된 난자의 초음파 사진이 오래 비친다. 그 너머로 의사의 목소리, 산모가 들어오는 소리와 같은 상황적 부산물들이 화면 속으로 개입하며 쇼트 하나를 완성해 낸다. 프렌의 임신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의사는 새 생명을 잉태하게 된 그에게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감정을 다스리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가 처해있는 현실, 회사와 가정의 문제는 조금씩 그 경계를 침범하기 시작한다. 며칠째 무단결근하며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는 직원 준의 일을 처리하는 것도,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직원을 채용하는 일도 모두 만만치 않다. 다정한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날카로움을 드러내는 남편 탐의 존재도 조금씩 무거워진다.

나와폰 탐롱라따나릿 감독은 언제나 개인의 일상과 감정을 현대 사회의 시스템 속에 놓아두고 바라보고자 한다. 13년 전,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을 받았던 영화 < 36 >도 그랬다. 36개의 쇼트로 구성된 이 실험적인 영화에서 감독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기억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 바 있었다. 그의 필모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작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작품 <휴먼 리소스>도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회사의 인사과는 단순한 직장 공간을 넘어서는 의미를 안고 있다. 사람을 관리하고 분류하며, 규율하는 체계의 근원적 자리다. 프렌이 팀장으로 있는 이 부서에는 규정과 관료적 언어로 가득하고, 이미 체계화되어 있는 문서와 시스템은 인간을 생명체가 아닌 '리소스'를 관리하는 것처럼 만든다.

02.
타이틀인 '휴먼 리소스'라는 단어로부터 이 영화가 어떻게 인간의 삶에서 감정을 지우고, 오로지 생산성의 관점에서만 사람을 이해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프렌이 머무는 공간에서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닌, 시스템이 개인을 관리하고 규율하는 방식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런 언어의 비인간성은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극 중 모든 갈등의 바탕이 된다.

이러한 기계적 구조 안에서 프렌이 새 생명을 갖게 되는 일은 작지 않은 파문이 된다. 대표가 직원의 면전에 서류를 던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불평등한 사회, 당장 내일의 경기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미래, 정해진 규칙보다는 개인의 편리가 더 가깝게 여기는 듯한 의식은 그로 하여금 임신이라는 사실을 쉽게 드러낼 수 없도록 만든다. 임신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이유 또한 언어가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는 환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효율만을 추구하는 세상과 개인의 몸과 삶이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업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 규정되는 사회.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불확실한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것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가장 가까운 남편에게조차 알리지 못한 상태로. 감독이 해당 인물의 대사를 절제시키고 침묵과 정적을 자주 활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정이 언어로 옮겨지지 못하기에,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휴먼 리소스>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휴먼 리소스>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3.
물론 프렌이 사회의 시스템에 적응하고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종류의 인물이라면 영화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준의 자리에 신입 직원을 뽑아야만 하는 내러티브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영화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몇 번이나 서로 다른 인물과의 면접 자리를 주선한다. 그때마다 어느 하나의 조건이 서로 충족되지 못해서 이어지고 있는 상황. 결국 선택되는 것은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스무 살 남짓한 어린 여성이다.

어느 날, 처음의 자신감과 달리 그가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프렌은 묘한 죄책감에 빠진다. 전임자인 준이 그 자리에서 어떤 어려움으로 힘들어했는지 알면서도 아무런 변화나 대책도 없이, 같은 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갈아 끼워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다. 시스템과 부품, 지금 이 사회가 한 인간성을 어떻게 소비하고 다시 채우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나가 더 있다. 프렌 부부의 집 앞 일방 통행 길에서 일어나는 오토바이와의 갈등 장면이다. 일방통행이 설정되기 전부터 그 길을 이용해 왔던 원주민의 오토바이와 사회가 정한 규칙을 준수하고자 하는 남편 탐은 서로 비켜주지 않으며 기싸움을 하다 큰 문제에 직면한다. 결과적으로 남편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하는데, 오히려 그 모습으로 인해 '과연 옳은 일은 무엇이고, 사회의 정의는 어디에서 지켜지는가'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규율을 위해 인간성을 짓누르는 사회의 시스템이나 규칙을 지키기 위해 부당한 사적 제재를 가하는 이의 모습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서다.

04.
영화가 프렌의 시선으로 삶의 미시적인 부분과 개인의 감정을 포착하고, 기형적으로 뒤틀린 현대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와 관습을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역시 감정을 포착해 내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이 영화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침묵이나 정적인 구도를 선택하며 그 자리에 감정이 서서히 스며들 수 있도록 유도한다. 프렌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언제나 무표정에 가까운 태도로 존재하고, 감정 또한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의 측면을 비추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화 장면이 아닌, 한 인물이 운전하는 장면에서조차 인물의 측면을 찾아내는 구도는 흔히 쓰이지 않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감정적 양면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린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의 자리에서 보여지는 곳에서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사람이라면 분명히 느끼고 있을 감정적 동요를 지금 보이지 않는 반대의 측면에 감추어둔다. 그렇게 오롯이 모든 걸 감내해야 하는 한 인물의 모습을 완성해 내는 것만 같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휴먼 리소스>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휴먼 리소스>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5.
영화 <휴먼 리소스>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여전히 새 생명에 대한 기대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 찾기가 요원해 보이기만 한 여성의 모습을 담아낸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배치되는 세차장 신은 그녀의 외부인 사회와 내면의 간극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자리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세차장의 움직임과 침묵 속에서 무심하게 흘러가는 인물의 감정이 연결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 공간은 미약하게나마 프렌으로 하여금 숨 쉴 수 있는 틈이 될 것도 같다. 완전한 자유라 보긴 어렵다. 여전히 고민은 남아 있겠으나, 정화 가능성에 대한 기대(세차)와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로 정화할 수 없는 현실(결과)의 아이러니가 이 장면 속에 담긴다.

이 영화는 소비적 쾌락을 위한 작품으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둔 영화가 전혀 아니다. 그 대신 감정이 억압된 현실과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날들의 얼굴을 우리는 잠시 훔쳐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베니스가 <휴먼 리소스>를 오리종티 부문으로 초청한 이유일 것이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휴먼리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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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