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서 치매 엄마 데려온 30대 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김성호의 씨네만세 1176] <홍이>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육각형남녀라고들 한다.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 자리에서 주요하게 고려되는 여섯 가지 조건을 갖춘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좌표축 위에 각 조건을 능력치로 환산하여 표시하고, 그렇게 찍힌 각 점을 연결하여 육각형의 도형을 그려본다. 그 넓이만큼이 연애와 결혼시장에서 각자의 경쟁력을 이룬다. 이 개념이 한국의 연애와 결혼시장에서 상당히 공감을 산 모양인지 어느새 모르는 이가 얼마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여섯 가지 조건이란 다음과 같다. 외모, 성격, 학력, 자산, 직업, 집안. 이들 여섯 가지 조건에 대하여 각자가 갖는 우선순위야 천차만별이겠으나, 이중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한 조건이라도 빠진다면 육각형이라 불리지 못한다. 요컨대 하자가 있다는 취급을 받는다.

여섯 조건 가운데 집안이 있다. 연애며 결혼시장에서 말하는 집안은 무엇인가. 가정환경이 화목하다거나 불화가 있다는 정도에서 머물지 않는단 걸 쉬이 예상할 수 있을 테다. 긍정적으로는 본가나 처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느냐 이고, 나쁘게는 결혼 후에도 부담을 져야 할 처지인가를 뜻한다. 결혼을 앞두고 필수적인 질문이라고까지 불리는 '부모의 노후 준비가 되었느냐'는 물음은 곧 상대의 집안이 어떠한지 확인하는 것이다.

홍이 스틸컷
홍이스틸컷에무필름즈

딸이 치매 엄마를 요양원에서 데려온 까닭

요컨대 부모의 노후 대비는 자녀의 경쟁력이자 하자가 된다. 그저 이 나라 사람들이 유달리 속물적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노인을 부양하는 일이 가족 구성원의 책임으로 전가되고 있다는 것, 돌봄을 감당하는 것이 삶의 질을 심각하게 저하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서다.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수상작 <홍이>는 이 같은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상당하다. 주인공은 30대 여성 홍이(장선 분)다. 영화는 그녀가 요양원을 찾아 입원한 엄마 서희(변중희 분)를 데리고 나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로부터 홍이는 서희를 제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지내며 일상을 이어간다.

서희는 치매 환자다. 아직까진 경증이라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상인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언제고 악화될 여지가 있어 곁에 사람이 붙어 있어야 한다. 홍이가 같이 산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함께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일을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탓이다. 다행히 엄마와 연이 있는 이모(이유경 분)가 근처에 살고 있어 홍이가 일을 나가면 엄마를 맡아주기로 한다. 이모가 따로 돈도 받지 않고 도와주는 덕분에 홍이의 숨통이 트인다.

홍이가 요양원에서 서희를 데리고 나온 이유를 영화는 구태여 감추려 들지 않는다. 홍이는 당장 돈이 급하다. 사채까지 끌어다 썼는지 매달 이자를 내는 데만도 급급하다. 서희에게 매달 적잖은 돈이 입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다. 요양원비로 쓸 바에 그 돈으로 제 빚을 갚겠단 게 홍이의 심산이다. 서희도 홍이의 속내를 모르는 바 아니다. 당장에 통장과 도장부터 건네며 까칠한 소리를 쏟아내는 것도 그래서다.

홍이 스틸컷
홍이스틸컷에무필름즈

희망 없는 일상, 돌봄까지 더해지니

홍이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은 중년이 되었으나, 미래는커녕 현재조차 감당키 어렵다. 사범대를 졸업하고도 임용시험 문턱을 번번이 넘지 못한 그녀다. 언젠가 교사가 될 꿈을 품고서 노인 대상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지만, 벌이도 형편없고 온갖 잡일까지 떠맡는 신세다. 이곳이 아니고선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다. 어쩐 일인지 빚까지 잔뜩 지고선 투잡에 쓰리잡까지 숨돌릴 틈이 없다. 학원을 마치고 공사장에서 교통통제까지 하는 홍이의 일상이 버겁기 짝이 없다.

<홍이>는 극적 서사가 중점인 작품이 아니다. 제목인 '홍이'가 넌지시 드러내듯, 홍이란 인물의 현재를 가감 없이 보이는 게 곧 영화의 목적이 된다. 그녀의 일상을 영화는 담담히 뒤쫓는다.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일터에서의 문제들과 빌린 돈을 갚으라며 찾아오는 옛 연인 앞에서 궁색하고 뻔뻔한 소리를 늘어놔야 하는 상황들, 겨우 짬을 내어 만난 남자와도 마음 편히 데이트할 수 없는 나날이 지속된다.

30대 중반이란 나이는 그녀의 볼품없는 현재와 만나 막막하고 암담한 기운을 자아낸다.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는 외양이 그렇고, 삶에 치여 뻔뻔해져만 가는 성미가 또 그러하다.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은 건 그저 바깥의 못된 목소리만이 아니다. 저 스스로가 제게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 그게 무엇보다 아프게 다가선다.

홍이 스틸컷
홍이스틸컷에무필름즈

삶이 버거워서 사랑할 수 없다

영화는 팍팍한 일상 가운데 홍이가 연락하던 남자와 몇 차례 만남을 갖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홍이는 그 앞에서 솔직할 수 없다. 임용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정식으로 교사가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빚이 많아서 버는 족족 갚는 데만도 정신이 없다는 걸 차마 이야기할 수 없다. 치매 환자인 엄마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차마 알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거짓이 된다. 커다란 육각형은 아니라도 하자 없는 조그마한 육각형은 되는 듯 행세한다.

영화는 홍이의 실패를 그린다. 엄마의 치매는 나을 수 없는 병이다. 마침내는 모든 기억을 모조리 잃고서 인간으로의 존엄까지 상실할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 화해의 도모조차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보통이 아닌 그녀의 성질머리를 가까운 이들조차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다. 서로가 나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도, 같이 할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서로 여유가 없는 처지라면 더욱. 홍이는 연애 또한 실패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관계는 마침내 거짓으로 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거짓이 아니라면 시작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교사의 꿈이라 해서 어디 쉽게 이뤄질까.

주목할 것은 홍이의 실패가 그저 홍이 개인의 탓이 아니란 것이다. 홍이는 어찌 됐든 열심히 살아가지 않나. 꿈을 지키려 안달하고, 투잡에 쓰리잡을 뛰며 돈을 번다. 빚에 몰려 있긴 해도 그 빚을 갚으려 수단을 마련한다.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마땅찮지만 무어라도 해보려고 발버둥 친다.

홍이 포스터
홍이포스터에무필름즈

각자도생의 풍경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디서나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고도 성공하지 못하고, 가끔은 운이 없어 가족 누가 아프고, 또 그 책임을 내가 오롯이 져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돌봄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은 그를 감당할 만큼 여유로운 이에게만 찾아오지 않는다. 홍이처럼, 아니 그보다도 여유 없는 이에게도 돌봄이 닥쳐올 수 있다.

<홍이>는 홍이의 상황 가운데서 국가와 사회의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비추지 않는다. 그녀의 돌봄을 곁에서 돕는 이모의 존재조차 사적으로 얻어낸 관계일 뿐이다. 그 부재가 곧 홍이의 희망 없음이 된다. 고립이 된다. 제 삶을 부인하고 거짓으로 꾸미는 이유가 된다. 꿈과 사랑을 모조리 포기하는 까닭이 된다. 그건 과연 당연한 일일까.

지극히 평범한 중년의 여성이다. 대단히 비극적이거나 처절한 상황도, 특별히 애틋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도 아니다. 홍이는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못됐으며 적당히 이기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더더욱 영화를 보는 우리와 닮았다. 더 응원하게 되는 인물 대신, 더 우리와 닮은 인물을 배치한 건 이 영화의 지향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홍이>는 사회의 부재 속에서 희망 없이 낙오하고 고립되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잘 나지 못하고 운이 없어서 홍이의 실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정말이지 그래서는 안 되지 않느냔 것, 이것이 <홍이>가 던지는 외침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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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