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 아이돌의 최후

[넘버링 무비 511]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 연애재판 >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연애재판>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연애재판>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후카다 코지 감독은 일본 영화사에서 섬세하고 사려 깊은 시선을 지닌 연출가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일상의 틈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균열과 사회 구조의 모순을 포착하고 극으로 재구성하는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왔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하모니움>(2016)부터 최근작인 <러브 라이프>(2023)에 이르기까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침묵,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를 자신만의 속도로 드러냈다. 공통적인 특징은 극적인 사건보다 인물에 훨씬 더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민다는 것이다. 그 심리와 관계를 관찰하면서도 사회적 맥락 또한 놓치지 않는 것이 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런 감독이 이번 영화 <연애재판>에서 선택한 소재는 아이돌 산업과 연애 금지 조항이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한 여성 아이돌이 소속사와 팬덤, 언론의 압력 속에서 연애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물론 후카다 코지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이 과정을 단순한 스캔들이나 가십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계약과 사랑, 이미지와 현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감정과 사회적 폭력을 천천히 그려내고자 한다.

02.
"우리가 해피 팡파르를 톱 아이돌로 만들어 줄게."

영화는 제이팝 아이돌 그룹인 해피 팡파르의 공연으로 시작된다. 이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해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이들은 청순한 이미지로 사랑을 노래하는 가수다. 팬들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앨범을 구매하고 환호성을 보내며 이들에 대한 사랑을 열성적으로 표현한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맞교환되며 형성된 팬덤 문화인 셈이다. 어느 날, 그룹 멤버인 마이(사이토 쿄코 분)가 중학교 동창인 케이(쿠라 유키 분)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 후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에 소속사는 계약서에 명시된 '연애 금지'라는 조항을 앞세워 마이를 법정에 세운다.

이 이야기를 통해 후카다 코지 감독이 비추고자 하는 지점은 비교적 명확하다. 아이돌이라는 존재를 '상품화된 이미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 강요되는 침묵과 희생이다. 더 나아가, 연애 금지라는 계약 조항이 만들어내는 부당함을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 구조와 팬덤 문화 속에서 어떻게 정당화되어 왔는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의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은 이번에도 유효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일방적인 계약과 그릇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 또한 함께 지켜볼 수 있게 된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연애재판>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연애재판>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3.
실제로 감독은 일본 사회에서 일어난 몇 건의 법적 분쟁, 아이돌이 연애를 했다는 이유로 팬덤과 소속사의 압박을 받은 사건에서 출발해 이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해 냈다. 이야기의 중심축이 되는 마이와 케이 커플의 이야기 이전에 나나카(나카무라 유나 분)와 라이브 스트리밍 방송을 진행하는 게이머와의 연인 플롯이 주어지는 까닭이다. 다른 그룹 멤버들과 함께 동물원을 시작으로 노래방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데이트, 그리고 그 데이트 사진이 유출되는 사건이 마이 커플의 본격적인 문제에 앞서 제시되는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이 문단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여러 사례를 들여다보기 위한 것과 팬덤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파장을 그려내기 위한 것, 그리고 이후 일어나는 마야 커플과 관련한 문제 제기를 더 극적으로 해내기 위함이다.

그중에서도 나나카가 경험하게 되는 일련의 후폭풍은 마이가 법정에 서는 과정보다 훨씬 더 가깝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이 영화가 본격적인 법정물이 아니라는 점과 관객이 법의 논리보다는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훨씬 익숙하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된다. 다음 싱글 앨범에서 처음으로 센터에 배정되었던 자리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팬덤의 외면을 받게 되는 것은 기본이다. 악수회 도중 테러가 일어나며 직접적인 위협도 받게 된다. 아이돌에 삶의 전부를 건 일부 멤버들로부터 원망을 듣게 되는 것도 모두 홀로 감내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팬들이 원하는 '순수한 이미지', 소속사가 만들어내는 '상품으로서의 스타', 어쩌면 언론과 인터넷이 조장하는 '스캔들의 오락성'이 한데 얽히며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어느 곳에서 개인의 감정과 인격은 놓일 수 없다는 것이다.

04.
한편, 영화는 소속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연애 금지 조항을 단순한 '악', '잘못된 계약'으로 치부하지도 않는다. 나나카의 스캔들로 인해 테러를 저지르는 인물을 명확하게 그려내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함이다. 공연이나 팬 감사회가 있을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번 찾아와주던, 앨범이 나올 때마다 수십 장씩 구매해 주던 팬의 뒤틀린 애정이 이 장면에 놓인다. 하지만 이들이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고, 무대 위에 오를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관심과 사랑 때문일 것이니 양쪽 모두 윤리적 태도와 현실 사이의 거리는 좁히기 어려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가 다시 마이 커플의 이야기로 옮겨가기 시작하면서, 후카다 코지 감독은 모든 상황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연애 금지 조항이 왜 생겨났는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지, 무엇을 희생시키며 존재해 왔는지에 대해 서서히 다가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인물의 감정은 법적 언어로 번역되고, 한 개인의 내밀한 프라이버시는 계약서 위의 조항으로 환원되는 순간들이 그려지게 된다.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연애재판> 스틸컷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연애재판>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5.
"서로 사랑하는데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다른 모든 서사를 제외하고 마이의 내러티브를 따로 바라보는 작업도 이 영화에서는 주효하다. 특히, 연애 금지 조항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따르는 일은 감독이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의 변화 혹은 요구에 간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여기에는 다시, 이들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사야(에리카 카라타 분)의 존재가 중요하게 떠오른다. 8개월 후에 벌어지는 손해 배상 법정 소송 장면에서 소속사 측의 증인으로 나선 그의 말을 통해서다.

사야는 매니저이기 이전에 아이돌 출신으로, 한때 그 또한 같은 조항에 동의한 적이 있었다. 해당 조항은 일반 회사원과 달리 팬이 있어야 유지되는 산업에서 모두가 공공연하게 필요로 하는 조항이라고도 지금 믿고 있다. 극의 서사를 두고 보자면, 사야는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평면적인 인물이 된다. 하지만 마이는 그렇지 않다. 자신에게 어떤 미래가 주어지게 될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나아가고자 한다.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업계 자체의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기 위한 토대를 만들고자 함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올 정도로 사랑했던 대상, 케이와의 관계를 (어쩌면) 저버려야 할 수도 있는 리스크가 존재하지만 그조차 떠안고자 하는 것이다.

06.
"팬들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결국 이 작품이 나아가는 마지막 방향성은 이 영화 <연애재판>의 가장 큰 미덕으로 남는다. 사랑을 낭만적으로 미화하지도 않고, 계약의 실행에 대한 측면을 부정하지도 않으면서도, 이를 통해 어떤 흔적을 남기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을 제시할 수 있게 되어서다. 그리고 이 마지막 결정은 우리가 사랑과 자유의 정의를 얼마나 협소하게 생각해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법정 드라마의 형식을 일부 차용해, 산업과 감정, 계약과 사랑, 이미지와 진실 사이의 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자 하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후카다 코지 감독은 그 모든 균열 사이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을 마지막까지 훼손하지 않는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이렇게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연애재판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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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