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멈추지 않는 감독 연상호, '얼굴'은 또하나의 대표작이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174] <얼굴>

회의적인 이들이 적잖았을 테다. 연상호라는 이름을 계속 하나의 브랜드로 기억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하여 말이다. 지나친 이야기는 아니다. 지난 수년 간 그에게 실망했다 말하는 이를 숱하게 마주했다. 봉우리가 높은 만큼 골짜기는 깊어지는 법, 기대가 컸기에 실망 또한 깊었다 말할 밖에.

연상호의 등장을 떠올려 보자. 그건 한국영화사의 일대 사건이라 해도 좋을 일이었다. 2011년부터 매년 한 편씩, 그가 세상에 내놓은 애니메이션은 지금껏 한국 애니 역사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돼지의 왕> <창> <사이비>까지. 학교와 군대, 종교를 소재 삼아 그 안의 부조리며 폭력을 지극히 연상호 다운 방식으로 발굴해 내보였다. 왕따와 괴롭힘, 사람이 사람을 장악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이야기를 관련 주제가 사회적 의제로써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에 앞서 주목하고 밀도 있게 풀어낸 것이었다. 인간과 사회의 저변에 자리한 분명한 폭력성을 불평하고 선명하게 끄집어내는 솜씨가 그의 작품 가운데 일관됐다. 여기저기 연상호답다는 평이 쏟아졌다. 그건 그대로 작가의 소양이기도 했다.

21세기 벽두 출현한 한국 영화계의 굴직한 기둥들에 이어 작가라 부를 만한 이가 나오지 않던 시간이 길었기에 그의 출현이 더욱 반가웠다. 그가 애니에서 실사영화로 건너오기를 결정했을 때, 그것도 직접 쓴 각본으로 대규모 투자를 받아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연출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기대하는 이가 많았다. <부산행>은 무리 없이 성공했다. 애니에 비해 작가로서의 색깔이 옅어진 게 아니냐, 아쉬워하는 이도 있었으나 첫 실사영화란 걸 고려하면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다. 실사영화 첫 진입부터 한국영화사상 18번째 천만 영화 감독이란 타이틀을 따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얼굴 제작 현장 사진
얼굴제작 현장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기대와 우려, 동시에 받는 감독 연상호

딱 여기까지다. 감독 연상호에게 여전히 기대하는 이들조차 이후를 더 낫게 평가하지 않는다. <부산행> 이후 그가 내놓은 작품은 이렇다. 부산행의 전사를 풀어낸 애니임에도 전작들에 비추어 그 색이 크게 약해진 <서울역>, 다시 실사영화로 돌아와 관객수 100만 명에도 도달하지 못한 <염력>,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다시 한 번 이어갔으며 평이 영 좋지 못했던 <반도>가 연달아 나왔다.

응축된 장편영화 대신 넷플릭스와 손잡고 드라마로 방향을 튼 연상호는 <지옥>을 통해 흥행에 성공했으나 작가주의적 색채는 크게 옅어진 모습을 보였다. 이후 넷플릭스와의 동행을 이어가며 200억 원을 들인 대작 <정이>를 만들었으나 <승리호>와 함께 한국 SF의 아픈 역사를 남겼을 뿐이다.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 <지옥2>, 영화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개신교를 소재로 활용한 작품들도 흥행과는 별개로 새롭지 않다는 비판과 마주했다. 연상호란 이름으로부터 차기작을 기대하는 이는 이제 한 줌도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얼굴>은 또 한 번 나온 연상호의 신작이다. 나는 이 영화가 긍정적 의미에서 연상호다움을 다시금 보인 영화라고 여긴다. 부정할 수 없는 연이은 범작과 졸작 행렬에도 불구하고, 아직 연상호에게 기대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인케 한 영화라고 믿는다.

얼굴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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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하나로 장인이 된 남자, 그의 비밀

도장 하나로 장인이라 불리게 된 남자가 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임영규(권해효 분)로, 그가 파는 글씨가 어찌나 예쁜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장을 만든다'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을 정도다. 방송과 신문에 소개된 것도 벌써 수차례, 도장 하나로 번듯한 회사를 일군 그의 성취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어려움이 상존하는 한국에서 하나의 신화처럼 여겨진다. 임영규는 아내 없이 홀로 아들 임동환(박정민 분)을 길렀다. 시각장애인임에도 젖먹이 때부터 어린 아이를 키워야 했던 수고가 오죽했을까. 그러나 그는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 자란 덕이라며 심봉사도 해낸 일이 아니냐고 웃어넘길 뿐이다.

영화는 경찰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40년 전에 사라진 임동환의 엄마 정영희(신현빈 분)가 백골 시체상태로 발견됐단 것. 어릴 적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줄로만 알던 동환은 경찰서를 찾아 그녀가 살해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마침 이들 가족 곁에서 임영규의 성공담을 다룬 다큐를 찍고 있던 방송국 PD 김수진(한지현 분)은 무언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다. 남 일에 유달리 관심 많고 파헤치길 좋아하는 그녀다. 새롭지도 않은 지루한 성공담 대신, 어딘지 냄새가 나는 문제를 파헤치기로 결정한다. 그로부터 영화는 40년 전 정영희의 삶을 추적하는 김 PD와 그 곁에서 실상에 다가서는 아들 동환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40년 전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일했다는 어머니다. 가난하여 수출할 것 하나 없던 나라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경제적 번영을 이제 한창 일구어나가던 시절이었다. 자본주의와 세계화는 없이 사는 나라에게도 경쟁력을 허했다. 그건 바로 사람이었다. 값싼 노동력은 그대로 상품의 경쟁력이 되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피복은 지난 시대 한국의 주된 수출품이었고, 청계천은 피복업체가 밀집한 대표적 공단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저 자신을 불살라 한국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알린 전태일이 일한 곳도 1960년대 청계천의 평화시장이었다.

얼굴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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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단 시대의 고단한 삶, 스릴러가 되다

지금이라면 공장 허가조차 나지 않을 열악한 환경이다. 먼지가 가득 찬 공장 내부는 환기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폐를 고장 내기 일쑤였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어린 여공들 가운데는 요즈음이라면 고작 중고등학생밖에 되지 않는 나이도 수두룩했다. 하루에 15시간 씩 재봉틀이 돌았고, 쉬는 날은 한 달에 두어 번이 고작이었다. 수출로 일어서던 때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일거리를 쳐내려면 야근이 일상이어야 했다. 한국이 미성년 노동 관련 규제를 포함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뒤늦은 1991년에야 비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대가 그러하듯, 각박한 환경에서 사람을 굴려야 할수록 엄혹한 관리를 하게 되는 법이다. 청계천 피복공장 또한 철저한 계급제도로 운영됐다. 가장 위에 사장이 있고, 다음은 공장장, 그 아래 재단사, 다시 재봉사, 마지막으로 시다가 있었다. 시다로 들어가 경력을 쌓은 뒤 재봉사가 되고, 다시 재단사를 거쳐 공장장에 이르는 게 이 업계의 성공이라 불렸다. 1960년대 시다 노동자의 평균 월급은 2000원대에 불과했다. 짜장면 한 그릇이 50원 언저리던 시절이니 쉬는 날 없이 온 종일 일해 하루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 좀 넘는 돈을 버는 꼴이다. 재봉사나 재단사가 되면 수입이 몇 배로 뛴다지만, 획일화된 규칙 없이 공장 내부 사정에 따르는 것이라 기약이 없다 해도 좋았다. 사실상의 노동착취, 비인간적 행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얼굴>은 이 같은 환경 속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다룬다. 말단 시다였던 정영희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당시 함께 일한 동료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알아간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영희는 유별나게 못난, 마치 괴물 같은 사람이었다고. 흉측한 외모 탓으로 모두가 꺼리고 놀렸던 그녀는 제 집에서조차 도망치듯 달아나 청계천에서 시다로 살아갔던 것이다. 이곳에서도 결코 쉽지 않았던 삶을 영화가 짚어나가는 과정이 그 자체로 흥미롭다. 정영희의 심각하게 못났다는 얼굴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카메라는 도리어 그로부터 극적 긴장을 얻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임영규의 상황 또한 제약을 통해 극적 효과를 얻는 요소로 작용한다.

얼굴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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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만 좇는 자는 추하나니

<얼굴>은 어머니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정영희란 인간, 모두에게 심히 못난 외모를 가졌다고 술회되는 이 여자가 알고 보면 더없이 맑고 선한 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 반대편엔 공장 사장이던 사내 백주상(임성재 분)이 있다. 그는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사진 찍기가 취미로, 아예 공장 사무실에 암실까지 갖춰두고 찍은 사진을 인화하던 사람이다. 그 사진찍기란 것이 참으로 괴상한데, 어리고 예쁜 여공들을 찍고는 했던 것이다. 그것도 그저 찍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겨 알몸을 찍었다고. 명백한 성폭력이지만 청계천에서도 사람 좋다 소문난, 근무여건도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은 공장의 사장을 고발할 용기 있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일생 아름다움을 좇는다며 여성의 사진을 찍는 이는 추악하기 짝이 없다. 반면 모두가 추악하다 하는 외양을 가진 여성은 선하고 아름답다. 얼굴은 영화의 주요한 설정인 못난 '얼굴'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다. 한 걸음 나아가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잘 생기고, 사람 좋단 평을 받고, 돈 많고, 좋은 배경과 직업과 학벌을 가진 이는 좋은 사람일까.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것과 진실은 영 다른 모양일지도 모른다.

영화 <얼굴>은 연상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그의 장기라 할 만한, 인간 본성의 일면을 드러내 보는 이를 불편케 하는 솜씨가 여지 없이 발휘됐다. 이에 더해 연상호다운 또 하나의 특징, 곧 거리낌 없이 새로움과 마주하는 도전정신도 엿보인다. 이 영화는 고작 2억 원으로 만들어낸 실험적 작품이다. 권해효, 박정민, 신현빈을 비롯한 검증된 출연진을 개런티를 대폭 삭감해 기용하고, 현장 스태프도 최소화해 불과 13일 동안 촬영했다. 각종 소품도 기존에 있는 것을 재활용했고 촬영 공간 또한 제한했다. 탄탄한 이야기와 역량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현실화됐다. 갈수록 기울어가는 극장과 투자위축 가운데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일선 감독으로의 고민이 낳은 주목할 만한 시도다.

연상호는 애니에서 실사영화로, 상업영화에서 드라마로, 충무로에서 OTT서비스로, 스릴러에서 SF로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어온 감독이다. 비록 그 모든 시도가 성공적이진 않았으나,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를 변함없이 지지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수시로 흔들렸으나 나 또한 마지막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은 하나였다. 오늘 <얼굴>에 이르러 나는 그에 대한 지지를 다시 확인한다.

얼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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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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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