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 어쩔수가없다 >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03.
"비 오는 날, 벼락 같은 거 안 맞나?"
이 작품의 외면에서 느껴지는 환기는 블랙 코미디와 스릴러 사이의 교묘한 균형으로부터 일으켜진다. 영화는 초반부에서 만수의 실직과 재취업 실패를 사실적으로 그리며 무거운 톤을 유지한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해 온 결과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한 남자가 하나의 신 너머로 물류 창고의 허드렛일과 면접 실패를 반복하며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통해서다. 하지만 그가 경쟁자인 세 인물을 제거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영화의 리듬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일부는 이 영화가 스릴러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획득되기도 한다. 살인을 저지르고자 하는 이의 행위가 조금도 전문적이지 않아서다.) 스릴러적 긴장감과 블랙 코미디적 웃음이 개입해 장르적 불안정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불안정성은 감독의 의도에 의해 극대화된다. 살인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하나, 조금도 계획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범죄는 감독 특유의 유머 감각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는 사회적 맥락과 결합되며 한층 더 복합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웃음과 공포, 연민과 불편함이 뒤섞인 감정적 혼란이야말로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구축하고자 하는 정서적 배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지난 영화에서 폭력이 어떻게 그려져 왔는지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언제나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폭력을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구조화해 왔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그렇다. 이번 영화 <어쩔수가없다> 속 만수가 저지르게 되는 살인 또한 다르지 않다. 그의 살인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정말 불가피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뒤로 밀려나 있다. 실제로 이 지점을 더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만수의 콘텍스트 속에는 술을 마시면 아이들을 때린다는 설정이 매달려 있다.
04.
"우리 집 안 없어져. 아빠가 약속할게."
영화에서 집이라는 공간은 인물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9살 때부터 이사를 전전하던 만수는 유년 시절 자신이 자란 지금의 집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설명된다. 하지만 실직한 그가 놓이게 되는 현실은 파산하고 집을 날리거나, 스스로 팔고 난 뒤에 빚이라도 정리할 수 있게 되거나의 기로에 서는 일이다. 물론 쉽게 선택할 수 없다. 어렵게 회복한 존재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은 만수에게 단순한 경제적 손실 그 이상의 공포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집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그이지만, 살인자의 시퀀스로 접어든 그가 자신의 사랑하는 집에서 어떤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지는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나가 더 있다. 범모(이성민 분)의 집이다. 같은 제지 산업에서 25년 가까이 종사한 인물로, 만수만큼 자세한 설명이 뒤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충분히 자신의 집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집안 곳곳을 비추는 CCTV부터 아날로그 전축까지, 집이라는 공간을 아끼지 않으면 마련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아내 아라(염혜란 분)의 불륜 사건이 발생한다. 남편이 떠나 있는 동안 젊은 남성을 집에 들여 사랑을 나눠왔던 것이다. 범모의 집은 그렇게 사랑과 신뢰가 무너지는 공간이 된다.
결과적으로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욕망, 사회 구조, 도덕적 파국이 교차하는 압축된 무대로 기능한다. 만수가 집을 지키려는 이유에는 유년기의 불안, 생존의 압박,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뒤엉켜 있다. 범모의 집이 무너지는 과정에서는 사랑과 신뢰의 파탄, 그리고 폭력의 개입이 뒤섞인다. 두 집은 서로 다른 사건을 품고 있지만, 둘 다 한때는 인간적 안온함의 상징이었다가 파국의 공간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하나는 외면적으로나마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에 놓이는 장면을 상기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 어쩔수가없다 >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5.
"내가 실직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잖아."
서사 속에서 하나의 구조가 반복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범모를 쫓는 과정에서 그의 아내 아라의 불륜을 보고 만수가 미리를 의심하게 되거나, [이를 위해 영화는 미리 곁에 치과 의사 진호(유연석 분)을 위치시킨다.] 또 다른 살인 장면에서는 아들의 도둑질 사건이 겹쳐지는 식이다. 이런 병치 구조는 만수의 범죄가 단순히 개인적 내면의 동기를 따르는 행위만이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균열 사이에서 어떻게 자기합리화를 발명해 내는지를 보여주는 자리가 된다.
실제로 원작 소설에서는 중심인물이 경쟁자를 하나씩 제거해 가는 과정이 이같은 구조로 그려지지 않는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철저히 실직 이후의 생존 문제에만 몰두하며, 자기합리화를 시도하긴 하지만, 다른 사건과 병렬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시도되는 병치 구조는 만수라는 인물은 단순히 해고된 가장이 아닌, 사회적 압박과 가정의 불화, 도덕적 위기 삼중고에 시달리는 대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박찬욱 감독이 새롭게 덧입힌 또 다른 레이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경찰인 줄 알았는데 아들을 붙잡아가자 안도하는 모습이라던가, 자신의 살인(아들의 절도)을 아버지의 참전 중 행위에 빗대며 먼저 저지르지 않았다면 자신이 당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행위 등이 모두 왜곡된 정당화로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06.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박찬욱 감독은 개인적 욕망과 심리적 균열에 몰두하던 이전 필모그래피와는 분명히 다른 결을 보여준다. 노동 시장과 기술 발전,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현실의 반영에 충실하면서도, 장르적 쾌감과 미학적 정교함을 끝내 놓치지 않는다. 블랙 코미디와 스릴러, 사회 풍자가 교차하는 이 작품에서 감독은 단순히 폭력의 미학을 반복하는 대신 변화하는 시대 속 인간 조건을 재해석하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어쩔 수 없음'의 세계를 그리고자 하면서도 체념이나 패배의 서사 속에만 머물고자 하지 않는다. 블랙 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현실의 부조리를 비틀고, 그 웃음 속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의 비극성을 마주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 밖에 남게 되는 것은 분명 웃음이 아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 존재하는 한 인간의 불안과 한계. 이 작품은 분명 박찬욱 감독이 완성해 온 작품 세계의 또다른 조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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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