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얼굴>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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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왜 영희의 가족들과 공장 직원들은 영희의 얼굴을 보고도 괴물처럼 생겼다고 말한 걸까? 그 이유 역시 '얼굴'이라는 제목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얼굴이 한 개인의 내면을 반영하는 틀이라면, 반대로 말해서 한 개인의 내면 상태에 따라 그가 보는 세상과 타인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다. 즉, 영희가 괴물같이 생겼다고 말한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내면이 그만큼 추하다고 자백한 것과 다름없다.
바로 영규가 그러하다. 그에게 영희는 특별한 존재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그에게 도장을 안 맡길 때, 영희는 처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깃든 예술성을 알아보고, 그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영희였다. 그래서 영규는 영희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믿는다. 영규에게 전해진 영희의 애정과 진심은 그만큼 아름다웠으니까.
그런데 집에 방문한 절친의 말을 듣자마자 영규는 돌변한다. 아내가 추녀라는 말을 듣더니 영희를 죽여 버린다. 친구의 말이 그의 왜곡된 가치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힘, 명예, 그리고 부(富)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받았던 영규는 자신의 손기술, 곧 예술성만이 자신이 가진 유일한 힘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추한 것을 병적으로 기피한다. 아름다움이라는 방패를 잃으면 언제든 다시 멸시받을지 모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영희는 영규가 그렇게 갈구한 미(美)를 지닌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곧고, 올바르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영규는 자신의 믿음과 판단을 신뢰하지 못했다.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비틀린 가치관에 근거하여 아내를 추하다고 낙인찍고 그녀를 살해했다. 본인 눈으로는 확인할 수도 없으면서. 그렇게 영규는 영희의 얼굴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추한 내면 때문에 남들에게 멸시당할 만큼 추해져 버렸다.
증언만큼 추악한 내면
영희를 추하다고 말한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내면은 영희의 생김새에 대한 그들의 증언만큼이나 흉측하다. 교류가 전혀 없었던 동환의 이모들과 사촌 형제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장례식장에서 다짜고짜 동환의 외할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나눌 생각이 없다고 밝힌다. 그들 간의 대화를 녹음해서 증거로 쓰겠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골에 대한 예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백 사장도 만만치 않다. 그는 자기 권력과 돈을 이용해 어린 여공들을 성폭행했고, 영희의 최후를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감춰버렸다. 영희의 사수는 또 다른 형태로 추하다. 그녀는 온 공장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위로하고, 자신을 대신해 용기를 내고, 행동에 나선 사람을 비난했다. 시대상을 고려하면 강간 피해를 숨기려던 그 심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비겁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김수진 PD도 마찬가지다. 동환이 가족사의 비밀을 방송에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자, 그녀는 영희 증명사진을 건네면서 그를 비난한다. 어머니의 명예 회복에는 관심 없는 불효자라고.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애초에 그녀가 영희의 사망을 취재한 동기는 정의감이 아니라 화제성이었으니까. 심지어 인터뷰이의 동의 없이 촬영과 녹음을 진행하는 등 저널리즘 윤리까지 저버렸으니, 그녀가 동환을 책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떳떳할까
▲영화 <얼굴> 스틸컷플러스엠
동환은 수진이 준 어머니 사진, 영희가 공장에 입사할 때 찍은 증명사진을 들여다본다. 평생 궁금해하던 어머니 얼굴을 살면서 처음으로, 마침내 확인한 그의 표정은 잠시 기쁨으로 물든다. 그와 동시에 동환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괴물이라고 묘사했지만, 실상 어머니의 얼굴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자괴감으로 뒤덮인다. 사진을 꺼내기 전에 그는 잠시 망설였으니까. 어머니가 괴물같이 생겼을 거라고 단정하고, 사진을 확인하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영희를 괴물이라고 부른 이들과 다를 바 없어졌다는 자괴감이 그를 덮친다. 이에 더해 어머니의 사연을 전부 알아냈지만, 현재의 명예와 안락함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감추기로 결심했다는 부끄러움도 밀려온다. 그렇게 동환은 오열한다.
따라서 <얼굴>은 그 자체로 리트머스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영희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 관객들은 동환처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 나의 내면에 추한 모습은 없는지 되돌아보고, 아름다움과 추 정도를 확인한다. 즉 <얼굴>은 나와 동환의 차이점을 성찰하는 기회의 장인 셈이다.
아쉬움보다 큰 의의
사실 <얼굴>을 뛰어난 장르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의 추리소설, '해리 홀레' 시리즈에는 반복되는 격언이 있다. 아내나 남편이 실종되거나 사망했을 때는 90%가 넘는 확률로 배우자가 범인이라고. <얼굴>도 마찬가지다. 손에 남은 흉터를 가리고, 아내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는 영규의 첫 인터뷰 장면만 보더라도 영희를 살해한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진상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결말로 향하는 과정도 예측할 수 다. 구성 자체는 흥미롭지만, 전개는 클리셰에 의존한다. 이모들, 공장 동료들, 공장 사수, 백 사장, 그리고 아버지를 따로따 만나는 전개를 5개의 인터뷰로 끊어서 보여주는 구성은 인상적이다. 공간과 인물을 전환하면서 대화에 대화가 이어지는 평이한 리듬에 변주를 주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삽입된 플래시백도 긴장감을 조성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기교에도 한계가 있다. 지나치게 한 캐릭터를 범인으로 특정한 뒤 그에 맞는 증거와 증언들만 나열하다 보니 관객으로서는 후반부 반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장르적 관습에 익숙한 관객일수록 예측은 쉽게 적중한다. 그렇기에 <얼굴>은 이 작품이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사실을 깨닫는 충격의 정도에 따라 호불호가 크게 나뉠 수 있다.
하지만 <얼굴>의 제작비가 2억 원이라는 뉴스를 보고 나면 아쉬움도 곧 사그라진다. 배우 출연료를 깎는 식으로 제작비를 극도로 아꼈으니 <얼굴>의 제작 과정이나 결과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얼굴>의 개봉이 그 자체로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과언은 아니다. 손익분기점의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예산의 영화가 상당한 관객들의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니까. 침체기인 영화계 현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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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및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영화와 드라마를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