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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공연 문화는 고대부터 발달했다. 하지만 정식 극장 공연은 소수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었다. 1728년 영국에서 귀족 중심의 공연 문화를 처음으로 서민에게 대중화시킨 '거지 오페라'라는 공연이 등장한다. 거지오페라는 영어 가사에 민요 멜로디를 기반으로, 현실을 다룬 소재가 공감대를 얻으며 초연 이후 무려 62회 연속 공연을 이어갈만한 18세기를 대표하는 흥행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영국에서는 서민들을 위한 '뮤직홀'을 통하여 다양한 대중문화 공연이 성행하며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초기 뮤직홀은 손님들이 음주와 식사를 하면서 동시에 공연도 볼수 있는 구조였고, 특히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서커스로서 당시에는 식사를 하는 손님들 머리 위에서 곡예사들이 공중곡예를 선보이곤 했다고.
당시 뮤직홀에 관객들을 빼앗긴 데 위기의식을 느낀 연극 극장주들은, '공연법'에 따라 술을 파는 뮤직홀에서는 대사가 들어가는 공연을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뮤직홀에서 대안을 찾다가 인기를 끌게 된 장르가, 대사없이 몸짓과 표정으로만 이루어진 '팬터마임'의 등장이다. 훗날 무성영화의 대가가 되는 찰리 채플린도 팬터마임을 연기하던 뮤직홀 배우 출신이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뮤직홀은 프랑스까지 전파되며 '카바레'라는 독창적인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다. 본래 선술집이라는 의미로 출발한 카바레는 저렴한 가격에 음주와 식사를 하며 쇼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의미가 바뀌게 된다. 또한 1889년에는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초대형 카바레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물랑루즈'가 등장하게 된다. '빨간 풍차'라는 의미의 물랑루즈는 캉캉 댄스, 방귀쇼, 서커스 등 등 화려하고 파격적인 쇼들을 대거 선보이며 성인들의 공연장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떨쳤다.
유럽에서 꽃피운 공연 문화는 이민자들을 통하여 미국으로까지 건너가게 된다. 17세기까지만 해도 미국에는 여가생활을 즐길만한 공연 문화가 거의 없었고, 초기에는 유럽의 여러 인기 공연들을 도입해야 했다.
1732년 남부 맨해튼에 미국 최초의 상업극장인 낫소극장이 설립된다. 그 뒤를 따라 여러 공연장이 들어서며 극장가가 형성되기 시작된다. 여기서 세계 공연 문화에 한 획을 긋게 되는 새로운 장르, '뮤지컬'이 탄생하게 된다.
세계 최초의 뮤지컬 '검은 옷의 악마'
1866년 아카데미 오브 뮤직 극장에서는 본래 파리 발레단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극장 화재로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당시 니블로 극장의 소유주였던 윌리엄 휘틀러는, 자신의 극장에서 준비중인 연극에 발레 공연을 끼워넣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위약금이 부담스러웠던 아카데미 극장의 매니저 헨리 C 재럿은, 궁여지책으로 휘틀러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렇게 급조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뮤지컬로 꼽히는 '검은 옷의 악마'다.
대형 오케스트라에 100명의 발레단.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결합된 공연은, 장장 5시간 30분에 이르는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볼거리가 가득한 화려한 무대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이후 <검은 옷의 악마>는 무려 474회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했고, 이때부터 공연계는 '연극, 안무, 음악'이 결합된 종합예술로서 뮤지컬의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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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 미국 극장가에서는 뮤지컬과 더불어, 19세기판 쇼츠로 불리우는 '보드빌'이라는 새로운 공연 형식이 등장한다. 스토리 없이 아크로바틱이나 장기자랑 등 여러 가지 짧은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쇼로서, 온가족이 즐길 수있는 공연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880년대 들어 맨해튼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극장가는 다시 한번 북쪽의 롱에이커 스퀘어 일대로 대이동을 하게 된다. 이 지역이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브로드웨이로 자리잡게 된다. 1902년에는 뉴욕타임스 본사가 브로드웨이로 이전하면서 '타임스퀘어'의 탄생과 함께 오늘날까지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20세기 들어 브로드웨이는 본격적인 공연문화의 핫플로 입지를 굳힌다. 호황기였던 1920년대 후반에는 약 250개의 쇼가 공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브로드웨이는 미국을 덮친 경제 대공황과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타격을 입으며 한동안 침체를 겪게 된다. 브로드웨이는 2차대전시기를 전후하여 군인들을 노린 다양한 마케팅 전략과 작품들은 선보이며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애썼다.
또한 전후에는 경쟁자였던 영화의 인기를 이용하여 협업을 시도하는 새로운 생존전략을 도입한다. 브로드웨이 무대에 할리우드 영화 스타들을 세우거나, 혹은 인기를 얻은 브로드웨이 작품을 영화로 제작하는 방식이 유행하게 된다. 1950-60년대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은 성공한 뮤지컬 원작을 영화화하여 양쪽 모두에서 전설이 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렇게 브로드웨이는 할리우드 영화를 발판삼아 다시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60-70년대 들어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미국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자유를 강조하고 기존 사회 체제에 도전하는 '히피 문화'가 유행한다. 이 시기에 공연계에서도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락 뮤지컬 <헤어>는 브로드웨이 역사상 최초로 나체 공연이라는 파격적인 연출을 선보이며 전쟁에 대한 거부와 저항,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주장했다. 또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예수의 마지막 7일'이라는 민감한 종교적 주제를 록 음악과 결합하여 시청각적으로 강렬한 연출을 선보였다. 보수적인 대중들에게 찬반양론도 있었지만, 실험적인 공연들을 통하여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한층 다채로워진다.
브로드웨이에 찾아온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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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뉴욕시의 재정위기로 브로드웨이에 또 한번의 시련기가 찾아온다. 당시 파산 직전의 뉴욕은 한동안 치안과 도시관리 기능이 완전히 붕괴됐다. 더럽고 위험한 곳으로 낙인찍힌 뉴욕을 관광객들이 외면하면서 브로드웨이 극장가들도 경영난에 직격탄을 맞이했다. 이 시기 브로드웨이는 유흥업소와 퇴폐업소들이 성행하고, 매춘부와 노숙자들이 거리를 점령한 환락가로 전락했다.
그해 12월, 상황악화를 막기 위하여 연방정부의 조건부 금융지원 승인, 뉴욕시의 재정긴축과 도시 기능 회복 정책이 시행되며 뉴욕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회복해갔다. 특히 브로드웨이 배우들은 1977년 시와 함께 'I♥NY(아이 러브 뉴욕)' 캠페인을 진행하며 뉴욕과 브로드웨이의 이미지를 회복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또한 미국은 재정위기로 히트작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시 호황기를 맞이하던 영국 공연계와 협업을 통하여 흥행이 입증된 작품들을 수입하며 돌파구를 마련했다.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캣츠>,<오페라의 유령><레미제라블>,<미스 사이공>등 엄청난 제작비와 대규모 무대연출, 효과, 음악이 어우러진 '메가 뮤지컬'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한편으로 미국 뮤지컬은 수입 작품만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창작해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뮤지컬화'라는 새로운 컨텐츠를 개발하면서 또다른 전환점을 만들어낸다. 1990년대 <미녀와 야수><라이온킹> 등의 성공은, 애니메이션을 통하여 잘 알려진 스토리, 음악, 캐릭터를 실사로 구현해내며 뮤지컬계의 새로운 흥행보증수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최근에는 한국 뮤지컬도 브로드웨이가 주목하는 새로운 시장으로 올라서고 있는 중이다. 2000년대초반만 해도 연간 150억에 불과했던 한국 뮤지컬의 시장 총액 규모는 2024년 기준 한 4651억원을 돌파하며 공연 강국인 미국, 영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 규모로 까지 올라섰다.
2025년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미래 서울을 배경으로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의 사랑을 담은 작품으로, 세계 권위의 토니상 6관왕을 최초로 수상하며 'K-뮤지컬'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수립했다.
브로드웨이는 수많은 위기와 굴곡진 역사를 극복하고 오늘날 세계 공연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예술의 위대함과 끈질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한국 뮤지컬 역시 세계무대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더 많은 작품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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