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영화 <연의 편지> 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네가 숨처럼 내쉬는 호의들을 나는 평생 기억할 것이다."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분명 처음 시작에서 소리의 서사로 시작된다. 전학생 소리가 책상 서랍에서 호연의 편지를 발견하고,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며 과거의 조각을 맞춰가는 과정이 발단을 이루는 식이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에 이르면, 이 서사의 무게중심은 호연에게로 옮겨간다. 편지의 주인공이자 과거의 상처를 지닌 인물로서 그의 삶이 전면에 드러나게 되면서, 이 지점부터 이야기는 편지를 찾는 존재의 시선이 아니라 편지를 남긴 이의 시선이 된다.
시점의 이동은 단순히 서사의 주인공이 바뀌는 구조적 장치가 아니다. 소리의 현재적 탐색과 호연의 과거적 회상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다루지만,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다. 편지를 뒤따르던 서사가 호연의 이야기로 전환될 때, 영화는 시간을 교차시키며 부재와 상처, 기억과 같은 정서를 적극적으로 탐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소리의 현재 시점으로 복귀하면서, 영화는 편지의 의미와 모든 관계의 정리를 완성시킨다. 이 과정이 모두 지나고 나면, 소리는 더 이상 단순히 편지를 찾아 읽기만 하는 수신자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부재와 재회의 정서를 이어받아 새로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애니메이션 영화 <연의 편지> 속 서사 구조는 발견과 회상, 전승으로 이어지는 삼 단계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한 사람의 직선적인 성장담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다. 소리로 시작해 호연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소리로 돌아오는 이 흐름은, 편지를 매개로 세대와 시간, 타인과 자신을 연결하는 서사의 확장과도 같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닌, 감정과 기억이 서로의 서사를 건너 이어내는 과정을 포착하는 이야기가 된다.
05.
"옳다고 생각한 일이 상황을 나쁘게 만든다면 그건 처음부터 옳은 일이 아닐지도 몰라."
구조적으로 보자면, 사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서사는 단순한 편에 속한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인물의 시점으로 보자면 현재가 아닌 과거에서, 영화는 인물에게 세 가지 어려운 상황을 부여한다. 폭력과 따돌림, 말도 없이 사라진 친구로 인해 생긴 관계에 대한 의심과 흔들리는 정의에 대한 불신,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의한 트라우마다.
특히 소리는 이 문제들로 인해 자신이 머물고 있던 세상(공간)으로부터 도망치기까지 한다. 동순 또한 다르지 않다. 호연이 남긴 편지를 찾기 전까지 그는 큰 상실에 빠진 인물이다. 하지만 이 구조는 후반부로 나아가며 진정한 의미의 연대, 우정, 그리고 성장의 메타포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다른 학교로 먼저 전학 간 지민으로부터 전해진 편지 한 통과 김순이 기사님을 비롯한 또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 호연이 남긴 편지의 진심이 과거를 딛고 새로운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단순한 서사에 의해 진행되었다면 밋밋한 이야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편지를 매개로 한 이별과 재회, 성장과 회복이라는 점이 시간의 간극과 부재의 흔적을 마련해 내며 그 지점을 덮어버린다. 이 작품의 모든 환기가 불러일으키는 미처 말하지 못한 진심에 대한 떨림과 뒤늦게 다가오는 이해로 인한 감동과 같은 정서다. 편지를 쓰는 사람의 시점과 읽는 사람의 시점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이별의 시간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을 준비할 수 있는 정서적 토대, 기대와 희망이 일어난다.
06.
애니메이션 영화 <연의 편지> 속 인물들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는다. 앞서 설명한 대로, 타인에 대한 의구심, 관계에 대한 거리감, 과거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트라우마가 서사의 초반을 채운다. 편지를 둘러싼 비밀과 오해 또한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고,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인물은 갈등과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이 모든 부정적 정서는 일방적인 장애물이 아닌, 성장과 변화를 도모하기 위한 받침대가 된다.
편지를 하나씩 찾아가며 서로의 상처와 결핍을 이해하게 되고, 관계는 점차 불신에서 연대로 전환된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완전한 신뢰나 일방적 이해로 가능한 것이 아닌, 서로의 불완전함을 감내하며 시간을 공유하는 일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전환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성장 서사의 핵심이자 정서적 결론에 해당한다. 영화 또한 이를 보여주고 경험하게 만들기 위해 서사를 누적해 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원작을 기반으로 한 작품은 언제나 구설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원작을 그대로 옮겨 놓아도, 재창작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해석을 해도, 어느 쪽으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원작이 지닌 감정의 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시각적, 청각적 경험을 온전히 품어내기 때문이다. 편지를 따라가는 서사의 호흡, 인물 간의 관계가 불신에서 연대로 확장되는 과정, 그리고 이별과 재회의 순간이 남기는 여운은 모두 원작의 정서를 영화적 시간과 감각 안에서 새롭게 살아나게 만든다. <연의 편지>는 분명,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도 충분한 울림을 전달하는 그런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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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