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0년에 걸친 두 여성의 관계사를 15부작으로 펼쳐낸 <은중과 상연>의 섬세한 접근은 분명 인상적이다. 김고은과 박지현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감정의 교류, 시간의 층위를 섬세하게 표현해낸 연출은 두 여성 사이에 있는 애증과 연민과 동경의 감정들을 깊이 있게 묘사했다. 초등학생 시절의 순수함부터 40대에 겪는 과거의 회한까지. 두 인물이 겪어온 시간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은중과 상연>이 안고 있는 한계는 뚜렷하다. 앞서 두 여성의 관계묘사에 천착하는 드라마의 감정선은 섬세한 반면, 정작 드라마가 그려내는 것은 예측 가능한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질투와 동경, 갈등과 화해, 그리고 죽음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놓쳤던 감정들을 다시금 복기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공식은 익숙하다. 15부작이라는 방대한 분량은 오히려 이야기의 전형성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과연 은중과 상연의 관계사가 이토록 긴 시간을 들여 탐구할 만큼 특별한 것이었을까?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스틸.
넷플릭스코리아
섬세한 감정묘사를 꺾어버리는 선택들
<은중과 상연>의 가장 큰 강점은 정해진 결말을 나아가는 두 여성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과 피어나는 감정들에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정해진 결말로 내달리는 서사의 직진성이 한계라는 말도 된다. 상연의 죽음과 은중의 용서로 향하는 종착점은 명확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들은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수많은 갈등과 복잡한 감정묘사를 정당화하고 수습하기 위한 장치로 읽힐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은중과 상연의 갈등이 본질적으로 남성 인물을 매개로 폭발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10대, 20대에 자주 닥치는 상황이기는 하나, 이들의 갈등 요소는 시대적 상황과 각자의 가족환경, 서로의 결핍을 포착하고 그것을 동경하거나 질투하는 감정에 있다. 그러나 두 인물의 섬세한 감정의 결을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다루면서도, 결국 결정적 순간에는 남성을 개입시켜 갈등을 심화시킨다. 은중과 상연 사이의 미묘한 감정들이 충분히 흥미로운데도 불구하고 작품은 계속해서 이를 이성애적 욕망의 시발점으로 두려고 한다.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스틸.
넷플릭스 코리아
은중과 상연의 개별성이 완성될 수 없었던 이유
다시 제목을 돌아보자면 '은중과 상연'이라는 문장 자체가 이 작품의 의도를 보여준 셈이다. 두 사람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심층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이 드라마는 구조적으로 개별 인물의 독립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은중은 상연을 의식하는 은중으로, 상연은 은중을 애증하는 상연으로만 존재한다. 드라마 작가가 된 은중의 개인적 여정이나 영화 제작자로 성공한 상연의 커리어는 모두 이들의 관계사에 종속된다.
특히 상연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지만 불완전한' 존재로만 그려진다. 뭐든 잘하지만 공허한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만 늘 혼자인 채로 행복하지 않은 전형적인 설정이다. 상연이 말기암에 걸렸다는 상황 역시 이런 도식성을 강화한다. 상연의 예정된 죽음은 캐릭터에게 들이닥칠 필연적 귀결이라기보다는 은중과 재회하고 서로의 감정들을 해소하며 끝내 화해와 용서로 이끌어내기 위한 극적 장치에 가깝다.
물론 <은중과 상연>은 애초에 관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듯 김고은과 박지현의 연기가 꽃피우는 감정의 스펙터클은 충분히 강렬하다. 김고은은 상연을 동경하는 동시에 그것을 질투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소화했다. 여기에 상연을 향한 연민과 원망 섞인 표정은 예측된 서사를 넘어서는 힘이 있다. 박지현도 마찬가지다. 상연은 그늘이 없어보이지만 IMF와 가족에게 벌어지는 비극으로 급작스럽게 상황이 변하는 캐릭터다. 일적으로 훌륭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쉽게 얻어내지 못하고 끝내 파괴해버리려는 복잡미묘한 행동들을 기어이 설득시키고야 만다. 두 배우의 앙상블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은중과 상연>은 애증 서사와 화해 신화가 맞물리며 마침표를 찍는 작품이다. 익숙하고 안전한 이야기이지만, 15화라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은중과 상연이라는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어 그 인물들에게 몰입하게 만든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두 사람의 감정 묘사를 들여다 보는 이야기는 두 여성 간 우정을 동경과 질투, 애증과 연민으로 인수분해한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동경하면서도 질투하는 관계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이 은중과 상연의 관계사를 아주 끈질기게 탐구한 이유일 것이다.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스틸.넷플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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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직 노동자 겸 플랫폼 노동자. 음악-영화-책 감상이 유일한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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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에 미워한, '은중과 상연'이 그린 우정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