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배경으로 여성 앞세운 이 드라마, 전 세계를 사로잡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164] HBO <왕좌의 게임> 시즌8

여성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이는 그대로 현대 대중 콘텐츠의 성공방정식이다.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의 문화예술 콘텐츠에서 가장 주요한 수요층이 젊은 여성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일선 영화 제작, 배급사만 하더라도 2030 젊은 여성들의 취향에 맞추어 기획하고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미국에서 소위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흐름이 선명하게 부각된 것도 이것이 젊은 여성의 취향에 부합한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었다.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젊은 여성이 문화소비를 주도하는 건 전 세계적 경향이다. Worldmetrics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미주와 유럽을 포함한 서구 문화권에서 여성은 전체 소비의 70% 이상을 주도한다.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이 더욱 민감하며 활발하게 소비한다. 소비의 총량도 많지만 분야와 방식 또한 특징적이다. 브랜드 이미지와 이야기, 창립자, 마케팅 등에 여성은 매우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콘텐츠 소비에선 이 같은 경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기존 여성이 주도적이었던 콘텐츠뿐 아니라, 남성향이 명백했던 매체, 이를테면 애니메이션 등에서도 젊은 여성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영화평론가로 일하며 알고 지내게 된 일선 영화 투자사, 수입배급사 관계자들도 하나같이 젊은 여성에게 다가서기 위한 고민을 드러낸다. 여성주의에 입각한 영화를 들여오거나, 여러 측면 중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마케팅적으로 부각하는 건 흔한 일이다. "젊은 여자가 봐야 남자도 봐요" 같은 말을 숱하게 들었다.

왕좌의 게임 스틸컷
왕좌의 게임스틸컷HBO

중세를 배경으로, 여성을 앞세우며

동시 시청자 수만 1000만 명을 훌쩍 넘는 드라마다. 미국 드라마 역사상 흥행과 작품성 모두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작품이다. HBO의 명작으로 모두 8개의 시즌을 9년간 이어온 <왕좌의 게임> 이야기다. 조지 R. R. 마틴의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읽은 극작가 데이비드 베니오프가 방송국과 원작자를 설득해 빚어낸 이 시리즈가 21세기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콘텐츠 시장의 대표적 성공작이 되리라고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막대한 제작비가 드는 대서사 자체가 많지 않을뿐더러, 판타지와 결합한 중세시대풍 이야기가 성공한 사례도 <반지의 제왕>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왕좌의 게임> 시리즈는 성공했다. 매 시즌, 전작을 뛰어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제작사를 활짝 웃게 했다. 편차는 있으나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하곤 평가 또한 훌륭했다. 탄탄한 원작과 아낌없이 쏟아부은 제작상의 지원, 제 역할을 다해낸 연출과 연기의 공이었다. 성공의 요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역시 이 시리즈의 선구적 설정들이다. 각별히 이 드라마가 여성과 장애인을 활용하고 묘사하는 방식은 하나의 모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왕좌의 게임>은 미국 드라마 산업 속 여성의 위치를 진일보한 작품이다. 이 드라마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십 수 명에 이르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각별히 입체적이며 성장이 두드러지는 주인공 격 인물들도 대다수가 여성이란 점이 인상적이다.

왕좌의 게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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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들의 서사

모두 여덟 개로 이뤄진 전체 시즌의 줄거리는 이렇다. 웨스테로스 대륙을 지배하는 칠왕국은 일곱 개 대영주의 느슨한 연합체다. 본래 왕위를 계승하던 타르가르옌 가문의 치세를 끝낸 건 현 국왕 로버트 바라테온(마크 에디 분)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었다. 북부의 대영주 에다드 스타크(숀 빈 분)와 그의 가문은 반란군의 핵을 이루었는데, 난을 성공시킨 뒤 중앙 정계를 떠나 제 영지를 지켜온 지 벌써 수십 년이다. 드라마는 로버트가 의지했던 수관의 죽음 뒤 북방까지 걸음하여 에다드에게 수도로 와 신임 수관이 되어주길 요청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로부터 왕국은 다시 한번 혼돈으로 빠져든다. 새 수관이 된 에다드는 전임 수관이 죽은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 로버트의 아내인 세르세이 왕비(레나 헤디 분)가 제 쌍둥이 동생과 불륜 관계에 있었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수관을 죽였다는 것. 심지어 차기 국왕이 될 왕자들조차 국왕의 친자가 아니란 사실까지 파악한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윌리엄이 사망한 뒤 세르세이 라니스터와 에다드 스타크의 갈등은 급기야 내전으로 이어지고, 칠왕국은 왕좌를 둘러싼 한 바탕 혼란에 휩싸인다.

한편, 왕국 저편에선 반란으로 왕좌를 잃은 타르가르옌 가문의 마지막 후예 대너리스(에밀리아 클라크 분)가 세력을 형성해 웨스테로스로 건너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군대는 물론, 멸종한 줄 알았던 드래곤을 세 마리나 얻은 그녀는 칠왕국 왕좌를 되찾을 유력한 인물로 부상한다.

왕국의 왕좌를 놓고 세르세이와 대너리스, 또 아버지를 잃은 에다드의 자식들이 벌이는 싸움이 드라마의 중심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 북방의 장벽 너머 죽은 자들의 군대가 산 자들을 향해 휘몰아쳐 내려오는 이야기는 또 다른 위협으로 작용한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왕좌를 넘어 왕국과 인간의 운명을 가를 일대 대서사를 세르세이와 대너리스는 물론, 에다드의 자식들인 존 스노우와 산사 스타크, 아리아 스타크, 또 세르세이의 동생이자 칠왕국 유력 가문인 라니스터가의 자제들인 제이미 라니스터, 티리온 라니스터 등을 돌아가며 주목함으로써 다채로운 시각으로 대륙의 운명과 왕좌의 향방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긴장을 잃지 않고 풀어간다. 적어도 마지막 시즌 직전까지는.

왕좌의 게임 스틸컷
왕좌의 게임스틸컷HBO

여성을 부각한 선택, 성공의 비결 됐다

각별히 흥미로운 건 앞서 언급한 여성에 대한 활용이다. 원작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이상으로 작품은 여성들의 활약을 부각한다. 남성 등장인물이 적잖이 생략된 것과 달리, 여성 캐릭터는 비중을 더 얻은 사례가 상당하다. 특히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이들, 또 각 세력의 지도자로 부각된 이들 중 상당수가 여성이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권력의 중심 가까이에 있는 세르세이 라니스터를 비롯해 일국의 국왕이 되는 산사 스타크, 패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대너리스, 한 세력의 수장 격으로 상당한 존재감을 발하는 올레나 티렐과 야라 그레이조이, 리안나 모르몬트 등이 모두 그렇다.

여기에 더해 여성의 몸으로 해낼 수 없으리라 여겨진 일을 해내는 아리아 스타크와 브리엔느 타스의 존재까지 고려하면, 이 드라마가 노골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부각할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압제에 저항하는 것을 주제의식으로까지 삼고 있단 사실이 명백해진다. 제 남동생보다 활을 잘 쏘는데도 여자이기에 방 안에서 자수나 놓아야 하는 현실을 못마땅해했던 아리아는 드라마 가운데 가장 고단한 모험을 거쳐 마침내 실력 있는 암살자가 돼 가문의 복수를 해낸다. 그리고는 이야기 끝에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바다를 건너 새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또 브리엔느는 여자가 기사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뒤집고 기사가 되어 활약하고, 킹스가드의 영예를 얻는다.

중세 시대 역사와 정치, 문화적 요소를 적극 차용한 소설이 <얼음과 불의 노래>, 또 그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 <왕좌의 게임>이다. 여성은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제한적이고 재산 상속에 대한 권한 또한 제한되던 것이 이 시대의 일반적 법칙이었다. 혈연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서열에서도 남자 형제가 있는 경우 자동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실제 중세 역사에서 여성의 이름이 주요한 행위자로 등장하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

그러나 <왕좌의 게임> 시리즈는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 왕좌의 향배를 둘러싼 주요한 행위자 중 다수가 여성이다. 남과 여로 단순히 나누자면 남성보다 여성이 더 우세할 정도다. 가장 강한 양대 세력부터가 세르세이와 대너리스란 여왕들이다. 여기에 주요한 영주들까지 여성이 다수이니, 드라마는 여성이 이끌고 남성이 보좌하는 전혀 중세답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그대로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성공방정식으로 이어진다.

왕좌의 게임 포스터
왕좌의 게임포스터HBO

PC주의 대신, 앞장서 나아간다

이에 더하여 드라마가 왜소증이 있는 피터 딘클리지가 맡은 티리온 라니스터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이 역은 처음엔 제 가문을 위해 봉사하고, 나중엔 대너리스 막하에서 그녀를 보좌하는 수관으로 활약한다. 통상 장애를 수단으로 쓰거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묘사하던 방식을 넘어, 이 작품은 티리온을 그 자체로 다른 인물과 마찬가지의 욕구며 결핍을 가진 입체적 인물로써 묘사한다.

<왕좌의 게임>의 선택이 당대 문화예술계를 주도하던 PC주의 자장 아래 놓여 있단 건 명백하다. <왕좌의 게임>과 방영시기가 대부분 겹치는 AMC 채널의 대표작 <워킹 데드> 시리즈만 보더라도 좀비물에선 조연이기 일쑤이던 여성을 주역으로, 나아가 지도자 중 과반 이상으로 설정하여 톡톡한 효과를 누렸다. 물론 그 탓으로 초반 장점이던 액션에서 힘을 잃었단 비판에 설득력이 있으나, 이 작품이 수많은 좀비물 가운데 갖는 특별함이 이로부터 나왔단 건 부정할 수 없다. <왕좌의 게임> 또한 마찬가지여서 PC주의 열풍 가운데서 여성과 장애를 집중적으로 부각해 기존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응하려는 의지가 전 시즌 가운데 선명하게 노출된다.

<왕좌의 게임>의 사례는 오늘날 비난의 중심에 서기도 하는 PC주의의 적절한 활용례로 이해할 수 있다. 인어공주를 흑인, 백설공주를 라틴계 배우로, 심지어는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글래디에이터2> 주연으로 흑인인 덴젤 워싱턴을 캐스팅하거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 역을 흑인에게 맡기는 사례 등은 작품에 대한 평가를 갉아먹는단 비난과 흔히 마주한다. 흑인 여성 배우 신시아 에리보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예수로 등장한 건 PC주의 흐름의 정점으로, 이 같은 경향을 지지해 온 이들에게조차 비난을 받았을 정도다.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한 관객과 시청자가 제 작품을 선택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완성도를 도외시하는 선택으로 이어져선 안 된단 걸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왕좌의 게임>은 PC주의적 경향의 이점을 취하면서도 작품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단 것을 내보인다. 여성과 장애인이 보조적인 캐릭터가 아닌 주역으로써 충분한 활용도를 가졌단 걸 입증했다. 심지어는 시청자가 그를 반기고 흥미를 느낀다는 사실까지도 확인했다. 적어도 이 드라마 이후 적잖은 제작자들은 여성과 장애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그 자체로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얼마나 선구적인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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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