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심과 뉴타운 아파트가 교차하는 곳, '춤을 위한 집'이 생겼다

[리뷰]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은평' 개관페스티벌 안은미컴퍼니 <드래곤즈>

 국내 최초의 무용 전용 공공극장인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은평(서울무용창작센터) 건물 전경
국내 최초의 무용 전용 공공극장인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은평(서울무용창작센터) 건물 전경필립리

서울시 서북구에 위치한 '은평구 수색로 322-2'. 이곳은 오래된 주거지인 구도심과 뉴타운 아파트가 교차하는 곳이다.

지난 6일 토요일 오후 6시엔 이곳에서 낯선 빛이 창문을 새어 나왔다. 준비 기간까지 포함하면 10년 이상 걸린 '국내 최초의 무용 전용 공공극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곳. 그렇게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은평(서울무용창작센터)'은 오랜 기다림을 마치고 드디어 지난 4일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단순히 새로운 공연장만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한국 무용계의 오랜 숙원이 현실이 된 상징적인 공간이다. 개관 페스티벌의 첫 무대를 장식한 작품은 안은미컴퍼니의 <드래곤즈>다. 그날의 공연은 단순한 개막 축하가 아니라, 국내 최초라는 무용 전용 극장의 정체성과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선언이라고 보면 맞을까.

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차갑고 선명한 공기가 감각을 깨웠다. 새 건물 특유의 냄새와 댄스플로어의 은은한 광택이 코끝에 스쳤다. 좌석에 앉은 관객들은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리며 무대를 향한 기대를 나눴다. 블랙박스 구조의 단정한 외형과 다르게 무대 안쪽은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무대는 15미터와 23미터에 달했고, 높이는 9미터까지 천고가 뚫려 있다. 마치 예술의전당이나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나 가능할 법한 스케일이 이 작은 공간 속에 응축되어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기는 비록 256석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사이즈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여느 대극장의 VIP석만 따로 모아놓은 듯한 착각에 빠져 보인다.

사방은 검은색 가림막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중앙에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흰색 원형통이 놓였다. 통천은 마치 '집 속의 집'을 연상하듯 보는 이의 집중력을 자아냈고, 시선은 자연스레 무대 안으로 쏠렸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 장치가 은은한 빛을 뿌리며 객석을 스쳤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낮은 진동은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관객의 몸을 울렸다. 육안으로 보이는 천고는 9미터이지만, 텐션 와이어 그리드 위로 천장까지 6미터의 공간이 더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여유의 공간에서 내뿜는 음향의 잔향을 풍부하게 해주고 있었다.

현대무용의 거장이 오랫동안 공들인 <드래곤즈>

 안은미컴퍼니의 <드래곤즈> 코튼콜 장면
안은미컴퍼니의 <드래곤즈> 코튼콜 장면필립리

막이 오르자 무대는 폭발했다. 온갖 원색의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무대를 가르며 뛰어올랐다. 발소리가 바닥을 울릴 때마다 거대한 북소리처럼 공간이 진동했다. 곧이어 수시로 교체되는 의상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빨강, 파랑, 초록, 보라 등 원색의 의상은 무대 위에서 교차하며 폭죽처럼 번졌다. 안은미컴퍼니 특유의 원색 감각은 전작들에서도 익숙했지만, 이날 서울무용창작센터의 새 무대 위에서는 해방과 자유를 상징하는 듯 더욱 강렬했다. 의상의 변화가 곧 춤의 변화로 이어졌고, 색채는 곧 에너지로 변해 객석으로 흘러들었다.

무용수들의 몸짓은 장르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한국무용의 유려한 곡선이 곧바로 현대무용의 파열로 이어졌고, 발레의 직선적인 라인은 어느새 힙합의 리듬으로 바뀌었다. 전통과 현대, 고전과 대중이 충돌하고 섞이며, 국내를 벗어나 일본, 인도네시아, 대만 등 다양한 춤이 어우러진 새로운 언어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관객은 그 장면마다 숨을 죽이며 몰입했다. 객석에 앉은 어린 학생은 무심코 몸을 흔들며 리듬을 따라갔고, 중년의 부부는 손을 맞잡은 채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닥은 무용수들의 몸짓에 정직하게 반응했다. 너도밤나무로 마감된 댄스플로어는 충격을 흡수하면서도 몸을 다시 밀어 올렸고, 무대와 무용수는 서로를 지탱하며 호흡했다. 그 울림은 관객의 심장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소리와 빛, 무대와 몸짓이 동시에 맞물려 돌아가는 순간, 관객은 더 이상 '옵저버'가 아니었다. 모두가 무대의 일부가 되었다.

무용 전용 공공극장인 '서울무용창작센터'는

 블랙박스 구조의 단정한 외형과 달리, 무대 안쪽은 압도적이다. 전면은 15미터와 23미터에 달했고, 위로는 9미터 높이의 천고가 뚫려 있었다
블랙박스 구조의 단정한 외형과 달리, 무대 안쪽은 압도적이다. 전면은 15미터와 23미터에 달했고, 위로는 9미터 높이의 천고가 뚫려 있었다필립리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은평(서울무용창작센터)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다. 대지 1631㎡, 연면적 2963㎡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용을 위해 설계되었다. 상부에는 텐션 와이어 그리드 시스템이 설치돼 무대를 프로시니엄, 아레나, 런웨이 등으로 즉시 변환할 수 있었고, 최대 256석의 가변형 객석은 작품 성격에 맞게 배열을 바꾸며 관객과 무대의 거리를 자유롭게 조율했다. 천고 9미터의 공간은 무용수의 점프와 회전을 극대화했고, 조명과 음향은 무대 전체를 장악하며 몸짓의 감각을 배가시켰다. 무엇보다도 너도밤나무 소재의 댄스플로어는 무용수의 신체를 지켜주는 안전망이었다. 이곳에서 무용수들은 마음껏 몸을 던질 수 있었고, 관객은 그 몸짓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서울무용창작센터가 개막작으로 <드래곤즈>를 선택한 것은 필연에 가까웠다. 이 극장이 내세운 비전은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등 모든 장르의 몸짓을 아우르는 무대"였다. 안은미컴퍼니의 <드래곤즈>는 그 철학을 가장 충실히 구현한 작품이었다. 전통과 현대, 고전과 대중, 세대와 국적을 넘나드는 몸짓의 언어이다. 팬데믹 직전 아시아 5개국을 거쳐 진행한 리서치가 녹아든 이 작품은, 국경을 넘어 시대를 건너 결국 '우리 시대의 몸'을 만들어냈다. 특정 장르에 갇히지 않고 모든 몸짓을 환영하며 다양한 세대와 국적이 함께 춤추는 무대, 서울무용창작센터가 꿈꾸는 미래가 그날 무대 위에 선명히 드러났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 안은미 안무가는 커튼콜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숨이 차오른 목소리였지만 또렷했다.

"무용 전용 공연장이 은평구에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다. 앞으로 전 무용인들이 이곳에서 마음껏 자신의 작품을 펼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곳은 무용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곳이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들이 이곳에 서길 바란다."

관객들은 다시 한 번 환호로 답했다.

뜨거운 감동의 여운 로비에서 계속돼

 서울무용창작센터의 개막페스티벌을 장식한 <드래곤즈>의 안은미 안무가가 공연을 마치고 로비에서 포즈를 취했다.
서울무용창작센터의 개막페스티벌을 장식한 <드래곤즈>의 안은미 안무가가 공연을 마치고 로비에서 포즈를 취했다.필립리

공연을 마치고 로비로 내려오자, 열기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프로그램북을 손에 든 관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작품 이야기를 나누었고, 젊은 학생들은 안은미 안무가에게 사인을 받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카페에는 늦은 밤까지 웃음과 대화가 이어졌고, 한쪽에서는 무용 서적을 넘기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극장은 지역과 예술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무용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생활공간이었다.

"Every Body, Every One."

밖으로 나오자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무대 위에서 본 몸짓과 그대로 겹쳐졌다. 모든 몸, 모든 사람을 위한 무대. 서울무용창작센터의 첫날이 던진 약속은 분명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곳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무용수의 몸을 지켜내는 댄스플로어, 장르를 자유롭게 담아내는 무대 시스템, 관객과 호흡하는 가변형 객석, 누구에게나 열린 배리어프리 설계. 이곳은 오직 무용을 위해 태어난 집이다. 실제로 지난 4일 개막식에서 서울문화재단은 "레지던시 및 연습실로 운영 중인 '서울무용센터'와 함께 서북권 일대를 무용의 거점 벨트로 형성하여 한국형 K댄스하우스를 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은미컴퍼니의 <드래곤즈>는 그렇게 무용 전용 공연장에서 첫 불을 밝혔다. 9월 6일 은평구 수색동의 밤하늘에 울려 퍼진 박수와 환호는 단순한 환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100만 무용인의 염원을 담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안은미컴퍼니 드래곤즈 서울무용창작센터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은평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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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쓰고 있다. 문화예술 시사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에서 객원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있다. 현재는 '서울문화투데이' '더프리뷰' 등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