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백의 역사> 스틸컷
넷플릭스
윤석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세리의 곱슬머리에 담긴 함의로부터 엿볼 수 있다. 사실 대한민국의 중고등학교에서 곱슬머리는 그 자체로 일탈의 상징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염색과 펌이 금지인 두발 규정을 둔 학교가 수두룩했으니까. 이런 환경에서 곱슬머리는 이른바 '정상적'인 학교 시스템에 순응하는 대신 개성과 다양성을 표출하는 기표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말해 곱슬머리를 피는 것은 학교라는 질서에 순응한다는 의미였다. 세리와 달리 생머리를 지닌 쌍둥이 자매 혜리를 다른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모범생으로 괜히 설정한 게 아닌 것. 김현을 향한 세리의 짝사랑도 마찬가지다. 김현은 전교 100등 언저리 성적을 내고,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크고, 말썽도 안 부리고, 교우관계도 원만한 모범생 그 자체다.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질서에 완벽히 들어맞는 인물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세리의 고백 계획은 단순한 사랑 고백이 아니다. 이 계획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곱슬머리를 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습실에서 고백하는 것. 이는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해지고, 대부분의 고3이 그렇듯이 성적을 올릴 것을 전제로 한다. 결국 세리의 고백 계획은 이른바 '정상적'인 학교 질서에 편입하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그들의 사랑이 특별한 이유
윤석이는 정반대다. 그는 한때 정상적인 질서의 정점에 올랐다. 전학 오자마자 대충 본 모의고사에서 바로 전교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고, 아버지가 의대 교수인 만큼 집안 배경도 좋았다. 하지만 그는 이 시스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줄 세우기를 통해 1등 만을 걸러내고, 그 과정에서 밀려나거나 지친 학생은 실패자나 낙오자로 낙인찍는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 윤석이에게 세리와 세리 아버지의 관계는 신세계다. 세리 부녀의 대화 내용은 온 가족이 수능을 앞두고 신경이 곤두서는 고3 가정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즉, 그들의 존재는 아버지가 강제적으로 주입한, 공부를 통해 성공하는 세계 외에 다른 우주도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윤석이에게 세리, 세리의 가족, 세리 아버지의 아지트는 어찌 보면 힐링의 대상이자, 장소이자,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윤석이가 세리와 사랑에 빠지는 궁극적인 이유라 할 수 있다. 결여된 것을 채워주고, 자기가 겪은 고통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이니까.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몰랐다"(I didn't know what I wanted until I met you)라는 깜지 내용대로다. 삶의 의지를 잃은 나머지 바다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윤석이를 세리가 구해내는 그들의 첫 만남에 이미 암시된 바이기도 하다.
결국 세리의 곱슬머리는 대한민국의 학교, 곧 사회적으로 규정한 정상성만을 요구하는 시스템을 거부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한 데 집합한 오브제나 다름없다. 억지로 곱슬머리를 펴지 않은 채 자기 장점인 수영과 스포츠를 진로로 택한 세리. 아버지의 강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윤석이. 그들이 재회하는 결말이 의미심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라는 환상 속에서라도 그 저항과 도전을 현실화시키려는 의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년과 소녀 사이에서
▲영화 <고백의 역사> 스틸컷넷플릭스
흥미롭게도 <고백의 역사>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메시지를 보여주는 캐릭터와 화자를 분리한 뒤, 화자의 관점에서만 이야기를 전개한다. 실제로 영화는 김현에게 어떻게 고백할지, 윤석이에게 어떻게 마음을 전할지 걱정하는 세리의 고민으로 가득하다. 그 덕분에 청춘 로맨스물로서의 쾌감은 강화된다. 짝사랑의 풋풋함과 발랄함, 학창 시절의 엉뚱함과 에너지가 주목받기 때문이다.
반면에 윤석이의 서사에 담긴 주제는 넌지시,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선에서 그친다. 그와 세리를 대비하는 구조도, 곱슬머리에 담긴 의미도 날이 서 있지는 않다. 화자가 세리인 이상 윤석이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백의 역사>의 메시지는 무뎌지고, 개성도 부족해진다. 분명 재밌지만, 여러 넷플릭스 영화처럼 무난하고 심심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렇지만 <고백의 역사>는 무난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인상적이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처럼 결말에 이르러서 현실적인 분위기로 급선회하는 근래 한국 청춘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의 선례를 안 따르기 때문. 이처럼 장르적 본분에 충실한 덕분에 기저에 깔린 주제 의식이 만족감을 뚫고 나올 기회를 잡기도 한다.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완벽히 균형을 잡지는 못했어도, 남궁선 감독의 첫 장편 상업영화에 박수가 아깝지 않은 이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종교학 및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영화와 드라마를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