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한강전傳: 그녀의 일곱 인생> 스틸컷
EBS국제다큐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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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런 생각 많이 했거든요. 여러 가지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영화로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다 해봤지만. 항상, 도저히 용기가 안 나서 포기하곤 했는데. 한강 작가는 용기를 냈을뿐더러, 그 완벽주의, 결벽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 박찬욱 감독
이번 다큐멘터리가 흥미로운 것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을 우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강 작가는 이미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며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그의 인터뷰를 직접 촬영하고, 과거의 영상을 재조합하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한강전傳: 그녀의 일곱 인생>은 그의 이미지적 소비를 통한 방법을 피하고, 작품 속에 드러난 개인적 상실과 사회적 기억을 전면에 내세우고자 한다. 이에 따라 인터뷰이 역시 작가를 영광의 아이콘으로 소비하지 않고, 문체 속에 숨겨진 고통과 책임을 읽고자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화려한 이미지의 층위가 아닌, 작가 본연의 내면과 심리의 층위가 된다.
어쩌면, 이와 같은 형식은 작가의 수상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다는 기획 본연의 의도를 해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기념의 의미가 담긴 다큐멘터리는 그의 성취와 업적을 기리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기 마련이어서다. 하지만 한강의 문학이 언제나 인간과 사회, 언어와 침묵의 경계에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 작품은 그런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상화하지 않고 인간적 고뇌와 예술적 실험의 흔적 속에 작가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 이는 그에 대한 존중임과 동시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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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매체 사이의 예술적 협업 또한 의미 있게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국내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보기 드문 '인터미디어(Intermedia)' 작업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쉽게 이야기하자면 문학을 텍스트의 언어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음악과 춤, 미술과 같은 다른 장르로 불러와 재해석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문학적 경계를 다른 예술의 언어로 옮겨오며 경계적 예술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용가의 몸짓으로부터 소설의 문장을 읽고, 음악을 통해 서정적 정서를 듣고, 미술의 색채 안에서 애도의 감각을 발견하게 된다. 한강 문학이 가진 경계성(삶과 죽음, 언어와 침묵, 신체와 자연 등)이 여기에서도 다시 한번 체화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흰>의 애도 형식을 같은 색을 가진 여러 매개로 치환해 낸 장면이었다. 잃어버린 언니를 향한 작가의 애도가 여기에서 시각적 질감으로 확장되었다. 이는 책을 읽으며 독자들이 했을 상상이 이미지적으로 대리 재현되는 것과 같다. 원작이 있는 소설이 영화화되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관객의 체험이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지는 여러 인터뷰이들의 해석은 애도가 언어에만 갇히지 않고, 이미지와 색채를 통해 공동의 감각으로 공유될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한강 작가가 이제 와서 <흰>에서 죽은 언니를 이야기하는 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슬픔을 생각하고 이제서야 겨우 애도할 수 있게 되었구나." – 김중혁 작가
다큐멘터리는 이 과정을 단순한 재생산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이 서로를 보완하고 재해석하며 확장하는 협업의 장으로 자리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이전에 만났던 문학의 텍스트를 새로운 예술적 경험으로 다시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한강전傳: 그녀의 일곱 인생> 스틸컷EBS국제다큐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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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강전傳 : 그녀의 일곱 인생>은 단순히 한 작가를 기념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문학을 영상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과정이자, 한국 다큐멘터리가 도달한 새로운 지점의 증거다. 다큐멘터리라는 틀은 문학적 언어의 여백과 침묵을 다양한 예술 형식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독서라는 개인적 경험을 감각적, 공동적 체험으로 바꿔 놓는다. 이 과정에서 한강은 더 이상 텍스트 속에 머무는 이름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가들과 관객 사이에서 끊임없이 호흡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문학이 다른 예술로 건너가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살아 있는 사건이 된다.
다시, 이 작품은 한강이라는 개인을 넘어, 문학이 어떻게 사회와 예술을 연결하고, 또 어떻게 세계와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로 읽힌다. 기록과 해설을 넘어선 예술적 협업, 작가가 가진 이미지의 해체와 재구성, 관객 경험의 전환은 모두 이 다큐멘터리가 던지는 중요한 성취다.
이제 우리에게는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문학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그 질문 앞에서 다시 책을 펼치고, 스크린을 응시하며, 결국은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문학을 체험해야만 한다는 자명한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한강 작가와 그의 작품 모두는 새로운 출발선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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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