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은 차기작으로 정한 작품의 제작이 늦어지면 본의 아니게 공백을 갖기도 한다. 물론 개인 사정이나 재충전, 소속사와의 갈등 같은 여러 이유로 잠시 대중들의 곁을 떠날 때도 있다. 여성 배우들의 경우엔 결혼과 출산, 육아 때문에 짧으면 1년, 길면 2년 이상 공백기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배우의 작품을 많이 보고 싶어하는 팬들은 배우의 공백기가 길어지면 아쉬운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다.
원빈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대중들에게 '공백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배우다. <가을동화>를 기점으로 2000년대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원빈은 2010년 영화 <아저씨>를 끝으로 무려 15년 동안 연기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신작 루머가 나올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던 대중들도 복귀가 번번이 무산되고 공백이 10년을 넘기면서 반쯤 포기한 상태가 됐다.
원빈 만큼 공백이 길진 않지만 지난 2015년 원빈과 결혼한 배우자 역시 연기 활동이 꽤나 드문 편이다. 특히 이 배우는 월드컵이 끝난 직후였던 2002년 여름, 시청자들의 공허함을 채워준 명작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많은 마니아들을 양산한 배우이기에 뜸한 활동이 더욱 아쉽다. 자신만의 확실한 매력을 가진 배우로 큰 사랑을 받은 MBC 수목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이나영이 그 주인공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평범한 시청률에 비해 많은 마니아들을 양산한 독특한 드라마였다.
MBC 화면 캡처
자신만의 확실한 개성을 가지고 있던 배우
1998년 잡지 모델로 데뷔한 이나영은 1999년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 배용준의 여동생으로 출연하면서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드라마 <퀸>과 <카이스트>에 출연하며 연기 경험을 쌓던 이나영은 2001년 홍콩배우 여명과 함께 SF액션영화 <천사몽>에 출연했다. 하지만 <천사몽>은 서울관객 1만 2000명으로 흥행 참패하면서 이나영의 초창기 흑역사가 됐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02년 채팅게임을 소재로 한 최호 감독의 <후아유>에 출연한 이나영은 같은 해 7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 '인생작'을 만났다. 이나영은 <네 멋대로 해라>에서 뇌종양에 걸린 소매치기 출신 스턴트맨과 사랑에 빠지는 무명 인디밴드의 키보디스트 전경 역을 맡아 쉽지 않은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표현하며 호평을 받았다. 이나영은 <네 멋대로 해라>로 MBC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2003년 영화 <영어완전정복>, 2004년 드라마 <아일랜드>에 출연한 이나영은 같은 해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에서 2군 야구선수 동치성(정재영 분)을 짝사랑하는 한이연을 연기했다. 비록 영화는 크게 흥행하지 못했지만 이나영은 <아는 여자>를 통해 2004년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열었다. 강동원과 연기 호흡을 맞췄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이나영의 대표작 중 하나.
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나영은 2010년 드라마 < 도망자 Plan.B >와 영화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가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면서 급격히 활동이 줄었다. 2012년 늑대개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유하 감독의 <하울링>이 실질적인 이나영의 마지막 상업 영화 출연이었다. <하울링> 이후 CF에서만 간간이 볼 수 있는 배우가 된 이나영은 2015년 원빈과 결혼식을 올리며 큰 화제가 됐다.
2015년 12월 아들을 출산한 이나영은 2019년 이종석과 연기 호흡을 맞춘 tvN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를 통해 9년 만에 드라마에 출연했다. 하지만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열혈사제>의 기세에 밀려 최고 시청률 6.7%에 그치며 전작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상승세를 잇지 못했다. 2023년 웨이브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로 복귀한 이나영은 이청아, 정은채와 함께 드라마 <아너>에 출연할 예정이다.
막장 요소들을 신선하게 풀어냈던 드라마
▲이나영이 연기한 전경은 공연 도중 담배를 피우고 길에서 팩소주를 마시는 파격적인 여성 캐릭터였다.
MBC 화면 캡처
2002년 여름은 6월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2002 한·일 월드컵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대한민국 축구 서포터즈 '붉은 악마'는 한국의 마지막 경기였던 튀르키예와의 3·4위전에서 "SEE YOU @ K리그"라는 카드 섹션을 준비했고 월드컵을 통해 축구의 매력을 알게 된 사람들은 K리그 경기장으로 운집했다. 그리고 <네 멋대로 해라>는 가장 피하고 싶은 2002년 7월에 첫 방송을 시작했다.
<네 멋대로 해라>를 연출한 박성수 감독은 <햇빛 속으로>의 김현주와 김하늘, 장혁, <맛있는 청혼>의 소지섭과 손예진, 소유진처럼 신예들을 과감하게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연출자로 유명했다. <네 멋대로 해라> 역시 연기 경력이 전무한 '초짜신인'은 없었지만 양동근과 이나영, 공효진, 이동건으로 이어지는 주연 4인방 모두 주연으로 한 작품을 온전히 이끌어간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배우들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주요 인물들은 하나씩 결핍을 가진 소위 비주류 캐릭터들이다. 뇌종양에 걸린 소매치기 출신 스턴트맨 고복수(양동근 분)와 부잣집 딸이지만 무명의 인디밴드에서 키보드를 치는 전경(이나영 분), 치어리더(당시 치어리더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일을 하는 소녀가장 송미래(공효진 분)가 대표적이다. 이들으 서로를 통해 치유를 받으면서 시청자들에게도 많은 위로를 줬다.
1998년 최진원 작가와 안재욱, 김희선 주연의 드라마 <해바리기>를 집필했던 인정옥 작가는 <네 멋대로 해라>가 자신의 첫 단독 각본 드라마였다. 인정옥 작가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출생의 비밀과 삼각관계, 주인공의 불치병 등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온갖 자극적인 소재들을 대거 사용했다. 하지만 인정옥 작가는 이 뻔한 소재들을 특유의 필력으로 신선하게 풀어내면서 시청자들의 극찬을 받았다.
<네 멋대로 해라>는 '마니아 드라마'의 원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네멋 폐인'이라고 자처한 많은 열성 팬들을 탄생 시켰다. 실제로 이들은 2002년 12월 한국 드라마 최초로 감독판 DVD 출시를 이끌어냈고 대본집과 기념 책자까지 출간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촬영 장소를 돌아보는 '성지순례'를 다녔고 2003년 여름에는 복수와 경이 데이트했던 선유도 공원에서 '네멋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네멋> 최고의 '아웃풋'이 된 공효진
▲공효진은 <네 멋대로 해라>에서 오랜 연인에게 버림 받는 가장 불쌍한 캐릭터 송미래를 연기했다.MBC 화면 캡처
영화 <킬러들의 수다>와 <화산고>, 드라마 <화려한 시절>로 주목 받던 신예 공효진은 <네 멋대로 해라>에서 야구단의 치어리더로 일하면서 중학생 동생을 돌보는 송미래를 연기했다. 복수가 출소할 때까지 기다린 오랜 애인이지만 복수가 전경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졸지에 드라마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가 됐다. 그래도 공효진은 <네 멋대로 해라> 주연 배우 4인방 중 가장 오랜 기간 전성기를 누렸다.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 캐릭터들은 모두 연기 경력이 많지 않은 신예들이었지만 대신 고 조경환 배우와 이혜숙, 김혜선, 이세창, 김명국 등 경험 많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드라마의 퀄리티를 높였다. 특히 고복수의 부모로 출연한 신구 배우와 윤여정 배우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도 엄청난 '연기 차력쇼'를 선보였다. 그중 윤여정 배우는 "양동근이 나보다 연기를 잘하는 거 같다"며 후배의 연기를 극찬했다.
한국의 1세대 무술감독이자 '스턴트계의 대부'로 꼽히는 정두홍 무술감독은 대사가 많은 캐릭터로 출연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네 멋대로 해라>에서는 고복수가 다니는 액션스쿨의 수다쟁이 관장 역으로 출연했다. 아무래도 전문 연기자가 아니다 보니 연기는 다소(?) 어색했지만 시청자들은 이를 관장의 특징으로 받아 들였고 정두홍은 이후 류승완 감독의 <아라한 장풍 대작전>과 <짝패>에서 주연을 맡았다.
<네 멋대로 해라>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띠동갑의 여성 배우가 동반 출연했다. 고 이선균의 아내이자 전경이 속한 밴드의 보컬 별리로 출연했던 1976년생 전혜진과 1998년 SBS 드라마 <은실이>에서 열연을 펼쳤던 송미래의 동생 송현지 역을 맡았던 1988년생 전혜진이었다. 하지만 별리와 현지의 활동 무대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두 전혜진이 한 공간에 등장하거나 대사를 주고 받는 장면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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