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조엘 : 다 그런 거야' 티저 영상 중 한 장면
HBO MAX
명배우 톰 행크스가 소유한 '플레이톤'이 공동 제작사로 참여한 (그래서 그의 이름도 제작자 중 한명으로 등록되었다) <빌리 조엘 : 다 그런거야>는 독일 출신 유대인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일찌감치 클래식 음악과 피아노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뮤지션의 길로 접어든 빌리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출발한다.
재능 많은 음악인 빌리가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자란 롱아일랜드 지역 밴드 해슬스, 아틸라는 말 그대로 "제대로 망한 팀"이었다. 친구의 아내(후일 그의 첫 아내가 된 엘리자베스)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약물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노숙 생활 등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그였지만 제 정신을 차리게 만든 건 결국 음악에 대한 열정이었다.
뉴욕 대신 서부지역 LA로 떠난 그는 처참하게 실패한 데뷔 음반 < Cold Spring Harbor >(1972년)의 후속 음반 < Piano Man >(1973년)과 동명 타이틀 곡으로 비로소 첫 번째 상업적 성공을 맛볼 수 있었다. 시행착오를 겪었던 3집 < Streetlife Serenade >(1974년), 자신과 세계관을 실현해줄 밴드 멤버들을 처음 규합했던 4집 < Turnstile >(1976년)의 미지근한 반응으로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5집 < The Stranger >(1977년)의 전 세계적인 히트를 통해 빌리 조엘의 음악은 믿고 듣는 신뢰의 상징이 되었다.
오랜 기간 음악적 동료가 되어준 프로듀서 필 라몬(Phil Ramon, 1934~2013)과의 완벽한 협업은 이제 빌리 조엘 음악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쉼없이 이어진 투어를 통해 볼 만한 공연 전문 음악인으로도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그는 그래미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한 명작 < 52nd Street >(1978년), 생애 첫 빌보드 1위곡 'It's Still Rock'n Roll To Me'를 배출한 < Glass Houses >(1980년)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화려한 전성기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혼, 창작 활동 중단... 굴곡진 인생사
▲'빌리 조엘 : 다 그런 거야' 티저 영상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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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족쇄는 평온했던 가정의 불화로 이어졌다. 매니저까지 담당했던 엘리자베스와의 갈등 끝에 이혼 도장을 찍은 그는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아픔을 극복해나갔다. 팝음악 역사상 최초의 디지털 레코딩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 The Nylon Curtain >(1982년), 다시 한번 엄청난 부와 명성을 안겨준 1960년대 풍 낭만적인 록큰롤 앨범 < The Innocent Man >(1983년)의 대성공과 더불어 빌리는 슈퍼 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두 번째 결혼에 골인했고 딸 알렉사를 얻으면서 마음의 평온을 얻는 듯했다.
그런데 후속 음반 < The Bridge >(1986년)의 미지근한 반응은 또 한번의 회오리 바람을 몰고 왔다. 10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프로듀서 필 라몬과의 결별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스스로 가족 같은 인물과의 단절을 택했다는 점에서 음악계에도 큰 충격을 안겨줬다. 그 무렵 매니저의 횡령으로 인해 거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은 빌리로선 '급전 마련'이라는 발등의 불까지 떨어졌다.
다행히 모처럼 진행한 순회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기세를 모아 록그룹 포리너(Foreigner)의 기타리스트 믹 존스를 새 PD로 선택한 < The Storm Front >(1989년)는 세 번째 빌보드 1위곡 'We Didn't Start The Fire'를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배출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창작 과정에서 피폐해진 정서는 또 한번의 가정 불화를 야기했고 1993년 마지막 스튜디오 음반 < River Of Dreams > 제작은 그의 몸과 마음을 모두 갉아 먹고 만다. 오랜 음악 동료들과의 결별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이혼이 이 무렵 이뤄졌고 빌리는 이후 30여 년이 경과한 2025년까지 더 이상의 신작 음반 제작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비록 창작인으로서의 활동은 끝이 나고 말았지만 쉼없이 전 세계 각국을 누비는 콘서트를 통해 공연형 뮤지션으로서의 입지 만큼은 탄탄히 유지중이다.
인간적으론 결점 많은 음악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리 조엘 : 다 그런 거야' 티저 영상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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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170cm도 채 되지 않은 작은 키에 유대인 출신 독일계 이민 가정의 아들, 그리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익힌 피아노 솜씨와 천부적인 보컬과 작곡 능력만이 빌리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무조건 돈을 벌어야만 했고 생계를 위해 뛰어든 음악활동은 자신이 원했던 것 이상의 성공, 그리고 실패를 모두 안겨줬다.
전성기 무렵 빌리 조엘은 현지 비평가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펑크록이 기세를 올리던 1970년대 후반 혜성 같이 등장한 신예 음악인은 전통적인 방식의 창작에 열을 올렸고 뭔가 파격적인 형식에 매몰되었던 그 시절 평론가들은 빌리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쌓기에 급급했다. 영상 속 인터뷰를 통해 요즘의 어느 비평가는 이렇게 말한다.
"빌리는 듣기 좋은 멜로디를 잘 만드는 음악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이다."
어찌보면 남들과 가장 차별화된, 그리고 음악인이라면 꼭 갖춰야 할 미덕 중 하나를 보유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반응에 분노하면서 더욱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아끼지 않았던 빌리는 매 작품 마다 전작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늘 변화를 추구한 음반으로 세계 음악팬들을 사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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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인간적으로는 결코 본받을 구석이 적은, 결점 투성이의 사람이었지만 인터뷰에서 만난 전 부인들조차도 공통적으로 입을 모아 말할 만큼 빌리의 재능과 음악인으로서의 가치 만큼은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명 세션맨들과 연주해봐"라는 음반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동료들과의 의리를 선택했던 결과는 < The Stranger >부터 시작된 히트 음반 탄생의 뿌리가 되어줬고 그 무렵 1980년대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극단적인 보수주의 정책은 빌리 특유의 사회 참여적인 가사의 탄생에 일조했다.
이제는 좋지 못한 건강 탓에 예정된 투어를 취소할 만큼 팬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지만 여전히 빌리는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면서 여전히 피아노 건반을 힘차게 두드리고 있다. "우리에게 노래를 들려주세요. 당신은 우리들의 피아노맨! 오늘밤 노래를 불러주세요"('Piano Man' 중에서)라는 노랫말은 그에겐 이제 하나의 운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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