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03.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며, 루시는 해리와 존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앞서 설명한 그대로 두 사람이 가진 조건의 차이로 인해서다. 하지만 영화는 이 갈등을 단순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축소하지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낼 것인가'라는 차원으로 이 문제를 확장하고자 한다. 해리와의 사랑은 안정과 타협의 방식이고, 존과의 사랑은 불안정하지만 진실한 감정이다. 이 과정에서 루시는 사랑을 대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방식으로 인해 선택되는 것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한편, 주요 서사에서 벗어난 위성 사건 가운데 하나로 루시의 고객 가운데 하나인 소피(조이 윈터스 분)가 매칭 데이트 자리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사건이 제시된다. 이 장면은 사랑이나 연애가 단순히 경제적 조건이나 감정의 진실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관계에는 언제나 권력과 폭력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으며, 사랑은 그 위험을 제외한 채 낭만으로만 포장될 수 없다는 것. 루시 또한 이 사건을 통해 스스로의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커플매니저로서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데 집중해 왔던 그는 이제 '조건'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결코 안전하고 건강한 관계를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피에게 사과하고 다가가는 장면은 비로소 그가 단순한 중개자가 아니라, 윤리적 책임을 인식하는 인물로 전환되는 순간이 된다. 이 장면은 사랑을 경제적 교환이나 감정적 충동으로만 다루던 이전까지의 흐름을 뒤집으며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또 다른 요소로 안전과 존중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소피의 사건은 작품 전체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단순히 감정과 물질 사이의 균형이 아닌, 상대의 존엄과 안전을 지켜내려는 실질적인 책임까지 포함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셀린 송 감독 또한 이 순간을 통해 사랑의 속성을 다시 한번 확장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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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난 상품이 아니에요. 사람이에요. 나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요."
이 작품의 이야기가 마냥 로맨스의 전형으로 남겨지지 않고 현실을 반영하게 되는 것은 사랑이 자본주의의 언어로 환원될 때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지점을 포착하고 활용하고 있어서다. 물론 영화는 그 환원 과정을 풍자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적 진실성을 놓치지 않는다. 루시 또한 끊임없이 자본주의적 규칙을 따르지만, 결국 그 규칙이 사랑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해리와 존 사이에서의 갈등 자체가 결국 자본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힘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연애 문화가 직면한 근본적 모순을 비추는 역할도 한다. 경제적 조건의 노골적인 노출이나 불안정한 고용 구조가 뒤바꾸고 있는 결혼과 연애의 풍경을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여전히 살아남는 사랑의 가능성을 탐문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루시가 단순히 사랑을 둘러싼 삼각관계의 '대상'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커플매니저로서 타인의 관계를 조건으로만 재단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그 규칙이 무력해지는 순간을 마주한다. 해리와 존 사이에서 갈등하는 과정은 곧 두 남자 중 누구를 선택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전환된다. 이때 루시는 사랑을 통해서, 자신이 살아온 규칙의 허구와 균열을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루시가 수동적인 인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이유다. 오히려 그는 자기 내부의 모순과 마주하며, 사랑을 통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로 자리 잡는다. 그 선택이 해리든 존이든, 중요한 건 루시가 '조건에 맞는 사랑'을 외부로부터 강요받는 대신, '자신이 감당하고 싶은 방식의 사랑'을 스스로 규정한다는 데 있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소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컷소니픽처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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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화가 내놓는 답은 단순하지 않다. 루시가 해리와 존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게 되는지를 영화의 핵심이라고는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는 순간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루시는 더 이상 '계산된 안정'과 '진실한 불안정'을 비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 속에서 지속되는 감정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는 그래서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빌려오되, 그것을 뒤집는다. 보통의 로맨틱 코미디가 결혼이나 연인 관계의 성취를 해피엔드로 제시한다면, 이 영화는 사랑의 지속 가능성을 다시 질문으로 남긴다. 사랑은 결코 안정된 상태가 아니며, 언제나 조건과 욕망, 불안정성의 긴장 위에 놓여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이라고 말이다.
셀린 송 감독의 영화에는 언제나 경계에 선 인물이 등장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한 뒤, 미국에서 활동하며 이주민으로서의 경계적 위치를 늘 의식해 온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전작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나라와 언어, 시간의 경계가, 이번 작품 <머티리얼리스트>에서는 계급과 경제적 조건의 경계가 사랑을 가로막는다. 그녀의 카메라는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인물들을 포착하면서도,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진실성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사회적 맥락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시대에서 사랑은 더 이상 순수한 감정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사랑은 여전히 의미 있다. 물질적 조건에 압도당하는 순간에도 사랑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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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 <머티리얼리스트>를 전작인 <패스트 라이브즈>와 나란히 놓고 보면, 셀린 송 감독이 사랑을 다루는 태도는 일관된 결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층 확장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사랑은 '선택하지 못한 가능성'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헤어진 인연이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 다른 나라와 언어, 시간의 층위가 그들을 갈라놓는다. 결국 그 사랑은 실현되지 못한 채 '있을 수도 있었던 삶'으로 남는다. 그러나 영화는 그 미완의 상태마저도 사랑의 한 속성으로 존중한다. 어떤 사랑은 결코 완결될 수 없고,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반면 <머티리얼리스트>에서는 선택을 눈앞으로 끌어온다. 루시는 두 남자 사이에서 실제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이 선택의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같다. '사랑은 완결된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불완전하고 조건 속에서 흔들리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번 영화에서 그녀는 그 불완전성을 '경제적 조건'이라는 현실적 토대 위에서 가시화한다. 두 작품은 그렇게, 서로 다른 풍경 속에서 같은 물음을 반복한다. 사랑은 끝내 결단의 문제라기보다, 그 불완전함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라는 것.
결국 영화가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은 하나의 해답이다. 사랑은 조건에 의해 왜곡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 이는 안정과 불안정, 계산과 진실, 물질과 감정 사이의 긴장을 껴안는 행위와도 같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만 이 불완전한 삶을 견딜 수 있다. 그리고 영화가 그 과정을 보여주는 동안 감독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마주하고 살아낼 것인지 묻는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 모두는 루시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사랑을 계산하거나 회피하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유일한 감정임을 부정할 수 없다. 셀린 송의 <머티리얼리스트>는 그 사실을 낭만이 아닌 현실의 언어로 증명해 내고자 하는 시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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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