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가 이사왔다> 스틸컷
CJ ENM
03.
"말해. 널 선지 몸에서 영원히 내보내는 방법"
흥미로운 점은 관습적일 수 있는 긴장 구도가 영화 전체에 걸쳐 비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라면, '악마'라는 설정은 그 즉시 위협과 공포의 매개로 작동하며, 중심인물이 이에 대한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고 대결하는 사소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의 길구는 다르다. 그는 정보 차이의 우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선지는 자신이 밤에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모른다는 설정이다.) 선지를 관찰하는 내내 호기심과 이해의 방향으로 시선이 이동된다. 낮과 밤의 그를 모두 지켜보면서도, 그 간극을 자신의 의지대로 혹은 인위적으로 메우고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그 변화를 그녀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상근 감독 또한 선지의 변화(전환를 자극적인 특수효과나 과장된 사운드로 처리하지 않고, 호러 장르라면 빠른 편집으로 고조시켰을 긴장감과 두려움 대신 '낯섦'을 먼저 경험하게 만든다. 따라서 서사적으로 기대될 법한 전형적인 전개, 비밀이 일방적으로 폭로되고 갈등이 폭발하며, 문제가 해결되는 형식의 흐름은 그려지지 않는다. 변신을 문제 삼지 않고, 모두가 그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길구의 태도로 인해, 선지라는 하나의 신체에 공존하는 두 존재는 초반부 경계와 의심의 시선을 딛고 공존의 시간과 무게를 논의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기존의 형식을 다소 이탈하면서도 나름의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다. 지난 <엑시트>에 이어 이상근 감독과 연이어 호흡을 맞추고 있는 윤아는 낮과 밤의 선지를 완전히 다른 인물로 구현하면서도, 두 얼굴이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설득력을 확보한다. 낮의 선지는 목소리가 한 톤 높고, 발걸음이 경쾌하다. 밤의 선지는 발을 천천히 끌며, 말끝에 장난과 위협을 함께 담는다. 이 이중성은 분장이나 의상 변화보다 표정과 시선에서 힘을 얻는다. 안보현 역시 길구의 시선을 관객의 시선과 겹치게 만들며, 경계와 호기심, 그리고 이해가 서서히 스며드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04.
장르적으로도 이 영화는 참신하다. 뼈대는 로맨틱 코미디의 속성을 따르지만, 미스터리와 호러의 외피를 덧입히며 변주를 시도한다. 특히, 두 자아가 바뀌는 장면에서 형성되는 긴장감은 다시 웃음과 따뜻한 정서 안으로 녹아든다. 한국 상업 영화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2010년대 이후 주로 현실 연애의 장벽을 유머로 풀거나 특정 상황에 로맨스를 입히는 공식을 반복했다면, <악마가 이사왔다>는 연애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관계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인물들은 타인을 수용하는 법을 배운다.
한편, 선지의 변신은 초자연적이지만, 현실의 은유로도 읽힌다. 낮과 밤의 그녀는 사회적 가면과 사적 자아처럼 대조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얼굴을 철저히 분리해 살아간다. 길구의 태도는 그 간극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그대로 두고 곁에 서는 것에 가깝다. 이는 차별과 배제의 반대편에 있는, 공존과 연대의 태도다. 영화는 이를 구태여 설교하지 않고, 생활의 사소한 장면 속에 자연스럽게 담는다. 중후반부에 걸쳐 위협의 대상으로 제시되는 영식(신현수 분)의 존재는 이 자리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비록 그 대상이 악마 혹은 잡귀라 할지라도, 마냥 지워내는 것이 아니라 옳은 방법을 찾아 함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표현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이는 분명 전작인 <엑시트>에서도 깔려 있던 의식이다.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 스틸컷CJ ENM
05.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나 듣는 거 잘해."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상근 감독은 전작 〈엑시트〉에서 재난이라는 압도적인 외부의 충격을 통해, 끊어졌던 인간관계와 사회적 연결망을 회복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위기 속에서 인물들이 생존과 탈출을 위해 발을 내딛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은 속도와 긴박함으로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악마가 이사왔다〉는 그와 정반대의 접근을 취한다.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건 '움직임'이 아니라 '머무름'이다. 사건은 바깥이 아닌 안에서, 속도가 아닌 온기 속에서 전개된다. 인물들은 발을 내딛기 전에 멈추어 서서, 타인의 호흡을 맞추고, 그 사람의 세계가 가진 결을 천천히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이는 감독이 전작에서 쌓아 올린 '연결'의 테마를 확장하되, 그 방법론을 완전히 바꾼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영화는 거창한 메시지를 외치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오래 타인의 세계 앞에서 멈춰서 기다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반드시 눈에 띄는 사건이나 위기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온한 일상 속, 조용한 시간의 틈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경우가 많다. 〈악마가 이사왔다〉는 그 느린 결을 끝까지 지켜내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결핍한 감각, 서두르지 않고 곁에 머무는 힘을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그래서일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남는 것은, 이야기의 반전이나 충격이 아니라, 오래도록 잊고 있던 관계의 온도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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