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국은 아직 멀어> 스틸컷
(주)디오시네마
03.
유조가 사츠키의 인터뷰에 응하게 되면서 영화는 중반 이후 두 사람을 카메라 사이에 마주 앉힌 채 긴 대화를 시도한다. 처음에는 미츠키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사실 이 저변에는 유조가 마치 언니가 되기라도 한 듯이 학교 선배인 쿠보타씨에게 고백했던 일에 대한 의심이 짙게 깔려 있다. 실제로 인터뷰 도중 그는 자신이 유령을 볼 수 있으며, 미츠키가 살해당한 장소 인근에서 처음 마주한 뒤로 함께 생활하고 때때로 빙의 또한 가능하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역시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이제 그들 사이에는 미츠키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정확한 매개로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함께 있다'는 유조의 말은 '언니가 유조의 세상에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되어 동생 사츠키에게로 옮겨지게 된다. 영화는 이제 단순한 증언 채집의 형식이 아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감각을 동시에 인식하는 감정의 탐사로 전환된다.
여전히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사츠키와 미츠키를 불러오는 행위를 통해 증명해 보이려는 두 사람의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빙의'라는 사건 자체는 분명 아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살아 있는 자가 부재한 존재와 잠시나마 마주할 수 있게 되는 정서적 순간과 시도 그 자체가 의미가 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역시 이 장면에서 감정을 인위적으로 증폭시키지 않는다. 그저 인물의 감정이 공간의 기류와 뒤섞이며 동화되는 과정을 멀리서 담아낸다.
영화의 정서는 '닿을 수 없다'는 대상 사이의 절대적 거리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썼던 <되살아나는 소마이 신지>(2011)의 수록글, '긴가민가(あるかなきか) – 소마이 신지의 물음'(FILO no.45 재수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글의 서두에서 '거리의 감각을 결정짓는 것은 얼굴의 인식 불능에 있다'라고 말한다. '거리 때문에 얼굴을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고, 얼굴을 인식할 수 없음(얼굴이 보이지 않음)으로써 이 거리의 감각이 생겨난다'라고 말이다. 이 작품에서의 유조-미츠키, 사츠키-미츠키 간의 거리 차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감독은 그 거리를 슬픔만으로 채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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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왜 언니였을까 생각했어. 하필 왜 언니였을까."
영화의 시작에는 모자이크 작업을 하는 유조가 있다. 그의 행위는 화면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만들어 가리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미츠키도 있다. 유조만이 인지하고 마주할 수 있는 대상이다. 가려야 하는 부분과 드러낼 수 없는 존재. 영화의 초반부는 그렇게 '차단'의 개념으로 시작된다. 끝은 정반대의 움직임을 갖는다. 비가 쏟아지는 도로 위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유조와 미츠키. 유령인 미츠키는 비를 감각하지 못하지만, 유조는 미츠키 쪽을 향해 우산을 기울인다. 이때 우산은 비를 피하고 감각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대상을 인지하고 인칭을 부여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이 세상에 부재한 존재에 대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그의 고백까지도 허락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종속이 아닌 대등한 관계성, 더 이상 빙의가 아니더라도, 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 고백이 진짜 의미를 같게 되는 것은 중반부 인터뷰와의 대면을 통해서다. 같은 맥락에서 사츠키와의 인터뷰가 증언이 모인 상자를 붙들고 미츠키의 자리를 의미적으로 복원하는 과정이라면, 빗길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동은 그렇게 복원된 의미를 현재형으로 호명하는 일이라고도 다시 말할 수 있게 된다. 인터뷰는 부재한 존재를 설명 가능한 언어로 다시 불러들이는 절차에 가깝고, 고백은 설명이 아닌 관계의 언어를 시작하는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초반부의 모자이크/부재, '차단'의 개념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게 된다. 시작의 행위가 하나의 세계를 가리고 흐리게 만들어 '보이지 않음'의 윤리를 수행했다면, 마지막의 행위는 우산을 기울이고 관계를 호명함으로써 '상대를 바라본다'라는 정의를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이제 더 이상 마츠키는 '기억의 잔상', '부재의 대상', '의심의 발원'이 아니다. 유조의 말과 몸짓이 만들어낸 자리에서 그는 하나의 유의미한 존재로 현재에 자리한다. 애초에 비를 느끼지 못하는 존재였다 하더라도, 그 존재를 위해 우산을 드는 사람의 행동이 현실을 바꿔내는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사랑의 언어가 그렇게 존재의 형태를 재구성할 수 있음을 과장 없이 그려내고 있다.
▲영화 <천국은 아직 멀어> 스틸컷(주)디오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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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작품에서 시도되는 '대화-침묵-감정의 파동'에 이르는 일종의 단계적 구성은 이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다른 작품에서도 몇 차례 찾아볼 수 있다. <아사코>(2019)에서 사라진 연인의 그림자를 다른 인물 위에 겹쳐놓는 행위라던가,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서 죽은 아내와의 관계를 연극과 대화를 통해 불러내는 모습, 또한 <우연과 상상>(2022)의 에피소드 면면에서도 동일한 구성이 시도된다. 다만, 이 글의 처음에서도 말했듯이, 불분명한 서사와 미스터리한 관계를 통해 '설명 이전'의 상태로 밀어 넣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미츠키의 존재를 의심이 대상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전제'로 설명한다는 것은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해야 할 이유가 된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 줄기의 뿌리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의 카메라는 언제나 닿을 수 없는 것들을 곁에 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착하고, 그 곁에 머무르는 시간 속에서 관계의 결을 탐색한다. 영화 〈천국은 아직 멀어〉는 그 시선이 가장 간결하면서도 투명하게 응축된 작품이다. 부재를 외면하지 않고, 그 부재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조용히 보여주며, 결국 그것이 관계를 무너뜨리는 거리가 아니라 지탱하게 하는 간격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마구치가 이후 작품들에서 거듭 펼쳐 보일, '닿을 수 없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의 원형을 뚜렷하게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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