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연기까지 한 감독, 고등학교 시절 왕따 주동자로 내몰린 사연

[넘버링 무비 484] 영화 < 아무렇지 않은 얼굴 >

 영화 <아무렇지 않은 얼굴> 스틸컷
영화 <아무렇지 않은 얼굴> 스틸컷(주)디오시네마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오늘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사건이 아니라 시간을 먼저 세우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물이 어떤 사건을 겪게 되는지보다 그들이 한 공간에서 어떻게 시간을 나누고 채우며 서로의 호흡을 맞춰나가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그의 작품에서 서사의 변화는 돌발적 사건을 통해 제시되지 않는다. 함께 나누는 대화와 순간적인 침묵, 다시 이어지는 동작과 시선 속에서 관계의 밀도가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하고,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된다. 그 변화는 느리고 미묘하며, 눈에 띄지 않지만, 관객은 어느 순간 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영화 <아무렇지 않은 얼굴>(2003)은 그 태도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기록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출발점이다. 2000년대 초반, 일본 대학가에는 여전히 8mm 필름을 사용하는 학생 영화 문화가 살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디지털 영상이 서서히 보급되던 시기였지만, 저렴하고 가볍게 구할 수 있는 필름 카메라는 여전히 창작자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도쿄대학교 영화연구회 역시 그런 환경 속에서 활동했던 동아리였고, 감독 또한 그 안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카메라를 들고, 배우로 직접 화면 속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연구회에서 그가 만든 졸업 작품이자 데뷔작이 바로 이 영화였다. 지금에 비하면 거칠다는 느낌을 확연히 느끼게 되지만, 현재의 영화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학적 태도 또한 이미 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02.
영화가 가진 이야기의 틀은 간단하다. 여섯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고, 화면은 크게 세 개의 내러티브와 위성 장면들로 꾸려진다. 여름 특강으로 인해 도쿄로 향하게 되는 마츠이(마츠이 토모 분)와 이시이(이시이 리에 분)의 모습이 하나다. 이어, 도쿄의 어느 카페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엔도(엔도 이쿠코 분), 하마구치(하마구치 류스케 분), 그리고 오카모토(오카모토 히데유키 분)가 또 다른 장면으로 등장한다.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장면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은 엔도다. 마츠이와 고등학교 동창 사이인 그는 일주일 뒤, 이시이를 제외한 모두를 경마장으로 이끈다. 이들의 만남이 세 번째 내러티브가 된다.

청춘의 서사를 다루고 있는 만큼, 친구 사이 이면에 존재하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엇갈림이 조금씩 엿보이지만 그것이 서사의 중심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 이들 모두가 모이게 되는 과정이나 일어나는 일들조차도 관객들의 이해를 위한 단서에 해당할 뿐, 어떤 원인을 설명하거나 하나의 목적을 향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장소를 오가며 대화를 나누고, 뭉쳐졌다가 다시 흩어지는 일을 반복한다. 그 시간 속에서 장면은 그저 흘러가고 관계의 표면은 조금씩 달라진다.

 영화 <아무렇지 않은 얼굴> 스틸컷
영화 <아무렇지 않은 얼굴> 스틸컷(주)디오시네마

03.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지."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극 중 주요 배경 가운데 하나로 경마장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감독이 해당 장소를 선택하게 된 것이 우연 같지는 않다. 그는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관계의 밀도와 거리를 가늠하는 요소로 사용해 왔고, 이 작품에서 처음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경마장과 같은 개방된 공간 속에 존재하는 군중의 감각은 되려 심리적인 거리감, 고립감을 증폭시키는 매개가 된다. 그렇게 보자면, 영화의 처음과 끝에 놓이는 기차(공항과 도심을 오가는) 내부와 경마장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배경이 된다. 극의 시간적 감각을 구성하는 두 축이 되는 셈이다.

전자가 밀폐된 공간의 진동과 반복적 리듬을 통해 감정을 잔잔히 고조시키는 역할을 부여받는다면, 후자는 시야가 탁 트인 개방된 공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과 경주마의 역동적인 움직임 등을 통해 에너지를 발산하는 듯한 감각을 전달한다. 이처럼 두 공간이 만들어내는 대비는 아무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도 서로 다른 결의 시간이 어떻게 배열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런 분위기는 인물들의 관계를 결속시키고 엮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흩어지게 만드는데, 실제로 각자의 공간에 머무는 인물들은 그 환기와 닮은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04.
한편, 경마장 시퀀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하마구치의 고백, 고등학교 시절 왕따 주동자로 내몰린 적이 있었다던 회상은 그나마 영화 속 대화 가운데 가장 명확하게 어떤 '사건'을 언급하는 지점이지만 그 이상으로 더 확장되지는 않는다. 이 또한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인물들의 반응과 장소의 환기 전환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처럼 여겨지는데, 역시 사건 그 자체의 사실 여부보다 그 사실이 어떻게 인식되고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감독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작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대화들이 대체로 명확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분위기와 반응에 집중하는 방식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이는 일본 사회의 오랜 문제 가운데 하나인 이지메(苛め) 현상에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관심을 가져왔던 결과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인 <천국은 아직 멀어>(2016)에서도 왕따 문제를 경험했던 인물의 서사가 잠시 등장하고, 이후 연출한 <우연과 상상>(2021)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간접적인 소재로 해당 서사가 개입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극 중 하마구치의 이야기를 듣던 엔도가 같은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괴롭다며 퇴장하고, 이 지점에서 관계의 이형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고려하면 이 작품 속에서도 감독은 하마구치가 아닌 엔도의 시점에서 이 서사를 완성한 셈이다.

05.
"여름이 끝나버렸네."

영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은 학생 영화라는 한계가 있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세계관이 어떤 자리로부터 출발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기록이다. 조금도 거창하지 않지만, 자신이 원했고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원형을 이미 알고 있었던 감독. 그는 어쩌면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어떻게 기록해 가고, 그 안에서 관계의 온도 변화를 또 어떻게 포착하고 감각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핵심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면 이 영화는 아무런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장면의 나열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사건보다 시간을, 결과보다 과정을, 의미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가 그 안에 존재한다. 대화를 통해 극을 구조화하고, 배경과 시간을 통해 관계의 서사를 진행해 가는 과정 모두는 훗날 그의 모든 영화에서 반복해 울리게 될 맥박의 첫 박동과도 같다. 변화를 과장하거나 강요하는 대신 기다리는 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는 그 기다림에 의해 쌓이는 시간이 곧 영화와도 같다. 우리는 그저 그 시간 속에 함께 머무르며, 화면 너머에 존재하는 관계의 미세한 변화와 떨림을 우리 자신의 호흡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작품의 말미에는 정말 흥미로운 시퀀스 하나가 놓인다. 오래 등장하지 않던 이시이에 의해 나츠(夏), 일본어로 '여름'을 뜻하는 단어가 나열되는 지점이다. 이 글을 통해 이야기했던 공간과 시간의 축적으로 인해 완성되는 관계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단어의 나열은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관계의 종언을 말하는 마츠이와 시작을 이야기하고 싶은 이시이의 마음과도 같아서다. 우리가 마주해왔던 그의 '대화'가 둘 이상의 인물이 주고받는 형태가 아니라면 시도될 수 있을 법한, 그렇게 시도되는 장면이다. 사실 영화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당분간 내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 장면 하나로 기억되지 않을까.
영화 아무렇지않은얼굴 하마구치류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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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