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사진
(주)디스테이션
마츠코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회학자 악셀 호네트가 제시한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은 단순히 인정투쟁에서 실패한 데서 비롯하지 않는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개념은 존재론보다는 사회적 지평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마츠코의 투쟁은 사회적 '인정욕구'를 넘어선, 존재 자체를 향한 사랑의 갈망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보편적인 인간 욕구가 없지 않지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실존적 욕망이 더 강하다. 중학교 교사로서 사회적 역할, 착한 딸로서 가족 구성원 역할을 통해 인정받으려 노력했지만, 진정으로 원한 것은 그러한 역할과 상관없이 자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따뜻하게 안아줄 근원적 사랑이었다. 빈 집에 귀가해 다녀왔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스민 애잔한 슬픔의 배경이다.
마츠코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본능적이고 핵심적인 욕구의 결핍 상태에 처했다. 그녀는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작가지망생, 유부남, 심지어 자신을 교사 직에서 쫓겨나게 한 제자에까지 사랑을 갈구했다. 그렇게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갔다. 사랑은 주고받는 관계이며, 본원적으로는 주는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지만, 마츠코의 사랑은 받기만을 갈망한다. 얼핏 '주는' 외양을 취하지만, 주는 게 아니라 착취당할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존엄이 아니라 타인의 사랑이 필요했고, 그 결과 자신의 삶을 온전히 타인의 시선과 관계에 의존하게 된다. 마츠코의 삶이 현대인이 겪는 존재론적 외로움과 결핍을 보편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의 사랑이 비로소 특별해지는 것은 야쿠자가 된 제자 류를 위해 목숨을 포함해 모든 것을 내어놓고 그를 위해 인생을 걸지만, 기다림 끝에 철저하게 배신당하는 전과정을 통해서다. 그 지점에서 마츠코의 사랑학은 완성되고, 긴 번데기 시기에 들어가지만 마침내 나비가 돼 자신을 위해 날아오른다. 그 비상이 짧았기에 관객에게 안타깝고 아름답다는 잔영을 남긴다.
페미니스트에게 불편한 영화?
마츠코의 삶은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여성상의 비극을 고발한다. 그녀는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 타인의 요구에 순응하며, 남성의 시선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 든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삶 전반을 착취당하는 극단적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가 이 비참한 삶을 그려내는 방식을 두고 비극을 미화한다거나, 고통에 둔감하다는 식의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한 연출이 오히려 마츠코의 삶의 비참을 더 부각한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후자의 반론은 의도와 무관하게 실현된 리얼리즘이란 얘기다.
이 영화에 정신분석학을 들이대는 건 상투적이지만 영화제작에 반영되었을 것이기에 유효하다. 마츠코의 반복적인 사랑 실패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결핍에서 비롯된 강박적 삶으로 보이기도 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관점은 마츠코의 행동에 관한 이해의 지평이 된다. 마츠코는 병약한 여동생에게만 관심을 쏟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과장된 표정이나 익살스러운 행동을 반복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무의식적인 기도로, 아버지의 관심을 독점한 여동생과의 경쟁에서 유발된 행동으로 해석된다.
충족되지 않은 이 결핍은 성인이 된 이후 그녀의 삶과 사랑에 영향을 미쳐 마츠코는 자신의 삶을 파멸로 이끄는 남성들에게서 끊임없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찾으려 한다. 마츠코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고전 비극이나 신화의 인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삶은 고독한 현대인의 개인적 실패를 넘어, 보편적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신화의 비극적 구조를 담은 그릇이 된다.
나아가 신성?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사진(주)디스테이션
마츠코의 삶에서 가장 기이하면서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혐오스런 그녀에서 신성을 발견한 대목이다. 마츠코가 완결판 사랑을 쏟은 대상인 영화 속의 류는 그녀의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며 그녀를 신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위해 끝없이 희생하고, 배신과 폭력 속에서도 또다시 사랑을 찾아 나서는, 인간적으로는 더 없이 바보스러운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마츠코의 사랑은, 특히 류에 대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어떤 조건도 달지 않은 형태이다. 이 사랑은 기독교의 신을 포함해 인간이 신에게 기대하는 신성과 맞닿는다. 인간이 보기에 가장 바보스러운 사랑이 신의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을까. 그렇다면 신도 자신 존재의 뼈마디가 시려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어서 인간을 사랑한 것일까.
마츠코의 신성은 당연히 전지전능한 신에게서 발견될 수 없는 유형으로, 그렇기에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신이 높은 곳에서 내려와 인간을 사랑했다면, 마츠코 또한 가장 낮은 곳으로 기꺼이 추락했기에, 예수가 보인 것과 같은 인간적이면서 더없이 신성한 모습을 그녀에게서 상상하는 게 비약은 아니다.
영화에서 말한 마츠코의 신성은 고통과 결핍을 통해 얻어낸 인간적인 미덕을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가여움과 안타까움 속에서 발견되는, 연약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사랑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서 더 신성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적인 비극 속에서, 삶의 덧없음 속에서, 숭고한 가치를 찾아내도록 한 게 신성의 광휘라는.
블랙코미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영화는 엔터테인먼트다"라는 일념으로, 주인공 마츠코의 비참한 인생을 화사하고 튀는 뮤지컬 풍으로 연출했다. 상황과 영상의 부조화는 첨예한 호불호를 야기한다. 더불어 마츠코의 불행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극적 효과를 거둔 게 사실이다. CF를 잔뜩 엮은 잡탕이라는 비판과 함께, 어두운 소재를 감각적 연출을 통해 유치하지만 비참한, 말 그대로 블랙코미디로 잘 이끌었다는 호평을 받기도 한다.
영화는 마츠코의 일생을 끊임없는 추락으로 그린다. 더 떨어질 곳이 있나 싶은 곳에서 더 떨어진다. 추락의 원인으로 사랑이 제시될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랑엔 가족애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 이 영화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작품 세계에서 자주 발견되는 학대받거나 방치된 자식과 부모, 단절된 가족이라는 주제를 남녀 간의 사랑과 맞물려 심도 있게 다룬다.
마츠코의 비극적인 삶을 따라가는 조카 '쇼'(에이타)의 시점은 관객을 대변하는 중요한 서사적 장치이다. 그는 마츠코의 시시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혐오에서 동감과 이해로 바꾸는 데 핵심적으로 기능한다. 겉으론 혐오스럽고 시시하게만 보였던 한 인물의 삶이 실은 얼마나 숭고한 사랑의 투쟁이었는지를 깨닫게 만드는 화자의 역할이다. 쇼는 마츠코의 과거를 탐험하여 관객이 그녀의 삶에 공감하고, 그 비극의 원인을 함께 찾아 삶을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화려한 영상과 뮤지컬을 가미한 파격적인 연출 속에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를 우스꽝스럽게 녹여내어 좋든 싫든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마츠코의 삶을 통해 세상의 혐오를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삶의 의미와 존재의 희망에 관한 기묘한 찬가를 들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 받은 감동의 상당 부분은 원작 소설의 힘이겠지만, 영화를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감동을 배가한 연출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어 보인다. 관점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이지만, 끝까지 열린 마음으로 보고 나면 충분히 인생영화 몇 편 안에 들 수 있는 작품이다. 13일 개봉.
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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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세계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