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역 배우의 고백... 우린 결국 쇼맨이었다

[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마트에서 일하던 '수아'는 어느 날 유원지에서 괴짜 노인 '네불라'를 만난다. 얼떨결에 자신이 사진 작가라고 거짓말을 하게 된 수아에게 네불라는 자신의 사진을 찍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렇게 수아는 네불라의 사진 촬영을 돕게 되고, 네불라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사진을 남긴다. 국립정동극장이 제작한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아래 '쇼맨')는 이렇게 시작한다.

2022년 초연, 2023년 재연을 진행한 <쇼맨>은 <레드북>, <여신님이 보고 계셔> 등 화제작을 선보인 한정석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가가 합심해 만든 작품이다.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과 극본상, 남자주연상을 거머쥐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올해 국립정동극장 개관 30주년을 맞이하여 삼연을 펼친다.

7월 11일 개막한 <쇼맨>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수의 회차가 연달아 매진되는 등 뜨거운 반응 속에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네불라 역으로 남자주연상을 수상한 윤나무가 이번에도 같은 역을 맡고, 강기둥과 신성민도 함께 네불라를 연기한다. 이어 정운선과 박란주가 수아를 연기하고, 안창용·강민수(첫 번째 대역배우), 김연진·남궁혜인(두 번째 대역배우), 김대웅·장두환(세 번째 대역배우), 전성혜·염희진(다섯 번째 대역배우)이 각각의 대역배우를 연기한다. 공연은 8월 31일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공연 사진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공연 사진국립정동극장

우리는 모두 쇼맨이다

네불라는 한때 '미토스'라는 이름을 가진 독재자의 대역배우였다. 신체 사이즈를 미토스에게 맞추고, 목소리 톤과 말투 등 모든 것을 모방한다. 네불라 외의 대역배우들도 여럿 있었는데,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임무가 있었다. 네불라는 주로 미토스를 대신해 차량 유세를 다녔고, 사람들은 네불라를 미토스로 착각한 채 환호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네불라는 독재자를 따라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을 마주친다. 그는 어딘가 미숙하게 독재자를 따라하고 있었는데, 네불라는 선의로 그에게 조언을 건넨다. 그런데 곧이어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는데, 네불라가 미숙한 대역배우로 착각하고 조언을 건넨 그가 바로 미토스였던 것이다.

네불라, 그리고 여러 대역배우들이 모방했던 독재자도 누군가를 모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재자 미토스 역시 정해진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모방의 대상은 실체를 알 수 없다. 대역배우들은 물론 미토스도 일종의 복제품일 뿐, 원본은 사라진 채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바로 이 원본 없는 복제품, '시뮬라크르'의 문제를 다뤘다. 사람들은 실재하지 않는 기준에 맞추며 원본 없는 복제품, 또는 복제품의 복제품으로 전락한다. 문제는 시뮬라크르가 만들어낸 가짜 현실이 진짜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스스로 진짜라고 착각하며 가짜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

네불라도, 다른 대역배우들도, 그리고 독재자 미토스도 모두 시뮬라크르다. 대역배우 네불라는 가짜 현실을 살아가는, 주체성을 상실한 인물을 상징한다. 주체성의 상실을 네불라에게서는 직관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데, 네불라뿐 아니라 수아도 주체성을 상실한 인물이다.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공연 사진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공연 사진국립정동극장

잃어버린 주체성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사람들은 정해진 모델에 스스로를 욱여넣으며 '쇼맨'으로 살아간다. 수아도 평생을 기준을 모방하며 가짜 자신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마트에서 일하는 수아의 업무 중 하나는 과일을 골라내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모양이 이상하거나 짓무른 과일을 골라내 처분하는 것이다.

이때 과일이 제 자리를 지키려면 정해진 기준에 맞는 '정상'으로 판별되어야 한다. 만약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면 과일은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이는 수아가 골라내는 과일뿐 아니라 수아도 마찬가지다. 아니, 사람도 마찬가지다.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가 정해놓고 타인과 공유하는 기준에 맞춰 일률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주체성을 버리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부정도 필요하다. 뮤지컬 <쇼맨>은 바로 이런 사람들, 삶에서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개인을 다룬다.

네불라가 수아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한 까닭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불라는 자신이 인생에서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는 걸 깨닫고 자신의 주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남아있기는 한 것인지, 남아있다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네불라는 치열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사진 촬영을 모두 마친 후에도 고민의 답을 쉽게 찾지는 못한다. 결국 네불라가 주체성을 회복했는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해야 잃어버린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는지 알아냈는지 물어봐도 쉽게 긍정할 수 없다. 하지만 네불라는 수아와 함께 자신들이 쇼맨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렇게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다. 바로 이 인식이 주체성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비록 그 길이 멀고 험난할지라도.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공연 사진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공연 사진국립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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