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름이 지나가면> 스틸컷
(주)엣나인필름
03.
"니가 저기 바깥에 있는 애들이랑 같은 줄 알아? 그래, 같이 어울리다 보면 그럴 수 있어."
이야기의 중심에는 기준이 있다. 그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학업에 관심이 많은 부모 아래에서 별다른 문제 없이 학교생활을 해왔다. 이번 전학만 제외하면 그렇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준은 처음으로 내면의 혼란과 불안을 마주하고, 무력하게 드러내고 만다. 이 변화를 단순한 감정 기복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기준에게 이 문제는 분명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와 실제로 마주한 울타리 너머의 세계 사이에서 그가 계속해서 충돌하고 있음을 우리 역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영문 형제는 '완전한 타자', 함께 어울리더라도 같을 수는 없는 존재로 놓인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두 사람이 거울처럼 기준의 마음을 투영해 낸다는 사실이다. 특히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영문은 일종의 우상과도 같은 역할로 영향을 미치며 단순한 우정 이상의 관계성을 형성한다. 기준은 그로부터 이끌림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경험하며, 이중적 감정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물론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이해받지 못할 감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그런 아들의 감정을 묵살하고, 관계를 단절시키는 방법으로 더 강한 통제를 가해온다.
이런 과정 속에서 기준의 내면은 점점 더 큰 균열을 일으킨다. 무엇이 옳은지 더 이상 스스로 판단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무기력과 상실감 속에서 '성장'이 아닌 '붕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장병기 감독이 정확히 의도한 바처럼 보인다. 그는 이 영화를 '성장이 아닌 무너짐에 대한 이야기'라고 직접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기준은 이 여름을 지나며 무언가를 배우기보다는 잃게 된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영화 또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그 공허한 자리를 오랫동안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04.
"무슨 걱정이요? 잘 모르겠는데요. 기준이랑 이제 안 놀면 되죠?"
분명히 아이들의 시선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전면에 세워진 레이어 뒤에는 어른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기준을 사랑하지만, 통제와 강박의 형태를 갖춘 엄마의 사랑이 대표적이다. 그는 현재보다 미래를 중시하며,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 정작 당사자인 아들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태도를 취한다. 좋은 대학과 직장을 따르는 경로만이 삶의 옳은 방향이라 생각하는 듯했던 그 믿음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영준과 영문의 가정은 그보다 더 극단적이다. 두 사람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고, 최소한의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방임된 상태로 살아간다. 기준의 엄마는 더 이상 아들과 가까이 지내지 말아 달라며 종용하기까지 했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다. 어른들의 폭력과 무관심이 이들의 삶을 비틀고, 그 비틀림은 다시 사회적 낙인과 소외로 이어진다.
물론 영화가 그런 어른들의 태도를 직접 비판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의 부재와 선택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강한 어조로 암시해 낸다. 어른들이 만든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지켜낼 방법조차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적어도 이 영화는 서로를 상처 내는 일 말고는 없다고 말한다.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 스틸컷(주)엣나인필름
05.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은 아주 조용한 영화다.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성장 서사를 일부러 피하는 듯도 보인다. 대신 성장하지 못했던, 성장할 수 없었던 청소년의 내면에 끈질기게 매달려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여름은 결코 무르익을 수 없다. 제대로 된 돌봄이 배제되어 있어서다. 성숙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이해는 어긋나며, 화해는 찾아오지 않는다. 이제 영화는 묻는다. 이 무력한 세계 안에서 아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또 무엇인가?
거대한 울림을 찾을 필요가 있다. 충격적인 폭력이나 자극적인 사건 없이도 이 사회가 얼마나 아이들을 상처입힐 수 있는지 영화가 말하고 있다. 구조적 폭력은 제도의 이름으로, 교육이라는 명분은 사랑의 형태로 변질되고 오염된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길을 잃고 무너져 간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 방식은 과연 옳은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제 여름은 모두 지나갔지만, 그 여름에 머물렀던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 여운이야말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뚜렷한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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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