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화재가 기후위기의 직접적 징표 중 하나란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올해 국가적 재난이었던 의성발 경상북도 산불은 10만 헥타르 가까운 면적을 태우고 28명의 생명을 앗아간 뒤에야 꺼졌다. 약 일주일 간의 화재로 국가유산 31건, 주택 4458채가 소실됐다. 피해금액만 1조1300억 원이 넘어섰다.
한국에서 산불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산림청에 따르면 산불 피해면적은 1980년대 1만1120헥타르에 불과하던 것이 1990년대엔 1만3980헥타르, 2000년대 3만7260헥타르로 꾸준히 증가했다. 2010년대 8570헥타르로 줄었으나 2020년대 들어 지난해까지 연평균 6700헥타르가 훌쩍 넘는 산림이 화마에 소실됐다. 올해 역대급 산불인 의성발 경북 산불이 태운 면적은 1980년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모든 산불 피해를 합친 것보다 크다. 뚜렷한 증가세는 물론, 국가적 재난이라 부를 만큼의 대규모 화재 위협 또한 커진 상황은 통계로 선명히 확인된다.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호주와 미국, 러시아 일대에서 초대형 산불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고 천문학적 재산을 태운다는 사실은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하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산불 소방인력이 이들 국가에 파견을 가기까지 하지만, 국제적 연대를 초라하게 보이게 할 만큼 자연이 내린 재앙은 거세다. 큰 불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집과 일터를 등지고 탈출하기 급급하다. 산불이 개인의 삶은 물론, 도시와 국가, 문명까지 위협하는 대재난이란 사실을 이제는 부정할 수가 없는 일이다.
▲불이 지나간 자리스틸컷
서울국제환경영화제
기후위기 속 급증하는 산불
제22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 산불을 다룬 작품이 유달리 많이 선보인 데는 이 같은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테다. 한국 또한 산불피해를 극심하게 입어 영화제를 찾은 관객 또한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관련 영화를 찾은 모양이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이자 감독 마리아 벨렌 폰시오의 <불이 지나간 자리> 또한 화재를 주 소재로 담은 작품이다. 부동산 개발과 산불의 교차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확인케 한 영화는 12분짜리 짤막한 단편 극영화임에도 결코 가볍지 않은 감상을 관객에게 안긴다.
영화의 주인공은 여성 소방관 이사벨이다. 영화는 그녀가 부동산 개발업체를 찾아 난동에 가까운 소란을 피우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가 부동산 개발업체를 찾은 이유는 이 업체 탓에 산불이 거듭 일어나고 있다고 의심한 때문이다. 주민들은 물론 생태계까지 파괴하는 대규모 산불이 한 업체의 이익 때문에 발생한다는 의심은 음모에 가까운 것인데, 그녀의 말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따로 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같은 소방대 동료들마저 그녀를 외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녀가 업체를 찾아 난동을 피웠을 때 그녀를 막아서는 이가 있다. 나이든 남성인 그는 개발업체의 경비직원으로, 경찰을 부르겠단 협박 끝에야 그녀를 겨우 물리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을 테다. 이들의 연이 그렇게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불이 지나간 자리스틸컷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대피 안 가겠다는 노인을 구하라!
<불이 지나간 자리>는 이사벨의 걱정이 기우에 그치지 않았단 사실을 보인다. 마을 뒤 숲엔 대규모 산불이 일어나고, 소방대는 주민들을 긴급히 대피시켜야 할 상황에 처한다. 배제됐던 이사벨 또한 임무를 맡게 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확인하고 대피케 한다. 영화는 어두운 밤을 환히 밝히는 불빛과 함께 불이 산을 이글이글 태우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삽입하여 전면에서 산불을 포착하지 않고도 대단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영화는 이사벨이 한 집에 들어서며 진면목을 드러낸다. 그곳엔 앞서 언급한 부동산 개발업체 경비, 즉 이사벨과 몸싸움을 벌였던 노인이 있다. 그는 시시각각 산불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도망칠 생각이 없는 듯 TV를 켜고 중계를 보고 있다. 술과 안주까지 준비하고 태평하게 다가올 일을 맞이하려는 태도다. 어이가 없어진 이사벨이지만 어찌 그를 두고 보고만 있을까.
이사벨이 그에게 대피를 권하자 그는 대뜸 제 집에서 나가라고 경고한다. 단박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그들이 가뜩이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살가울 수는 없다. 어찌할 수 없어 쫓겨나듯 나온 이사벨은, 그러나 얼마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이대로 떠나면 노인은 그 자리에서 타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커진 산불이란 사람의 걸음으론, 심지어 자동차로도 내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옮겨가는 것이지 않던가. 노인의 굼뜬 동작을 고려하면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는 없는 것이다.
▲불이 지나간 자리스틸컷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당신이 안 가면 나 또한 가지 않겠다"
이사벨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다. 노인의 매서운 눈빛에도 그 맞은 편에 앉아 스포츠 경기가 중계되는 TV 화면을 두고 대화를 시도한다. 한시가 급박한 환경에서도 침착하려 하는 그녀다. 다가오는 산불을 이기지 못하여 전기 공급까지 끊어지고 TV도, 전등도 모두 꺼져 어두움과 점점 가까워지는 불에 타는 소리뿐이다. 가만히 초에 불을 붙이고 집에 남겠다 하는 노인과 어떻게든 그를 데리고 나가려 설득하는 이사벨의 대치가 평시라면 아늑했을 오두막집 안에서 상당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이사벨은 말한다. 당신이 가지 않겠다면 나 또한 움직이지 않겠다고, 여기서 어디 함께 타죽어 보자고, 나는 당신 때문에 죽는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배짱 싸움에서 갈수록 커져가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움직이는 건 결국 노인이다. 그는 중요한 것 딱 하나만 챙기란 이사벨의 재촉에 아까 꺼진 TV를 뽑아들고 걷는다. 이사벨과 노인이 나란히 불을 등지고 걸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영화 <불이 지나간 자리>가 끝을 맺는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인가.
영화는 그저 영화만이 아니다. 올해 초 미국 LA 일대를 휩쓴 이튼 산불 진원지 알타데나 지역 부지가 대규모 부동산 개발업체들에 의해 매집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 가운데 한 순간에 삶의 터전까지 잃어버린 이들이 부지를 업체에 팔아치우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게 불탄 땅에서 사려는 이는 오로지 부동산 개발업체 뿐이니 가격 또한 전에 비할 바 없이 추락한 상태라고. 알타데나 뿐 아니라 인근 여러 지역에서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막대한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마을을 재건하고 다시 분양하는 일련의 작업이 이들에게 막대한 차익을 남길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포스터서울국제환경영화제
산불이 돈이 된다고?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불 타 폐허가 된 땅이 싼 값으로나마 거래되고 재건을 바라보게 되는 건 자본주의 시장의 자연스런 흐름이다. 문제는 요지가 폐허가 된 상황이 부동산 개발업체에겐 대단한 기회가 된다는 점에 있다. 만약 이들이 불을 낼 수 있다면, 몰래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사업자가 그를 마다할까. 미국의 사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기 아르헨티나 어느 지역의 소방관 이사벨이 부동산 개발업체에 제기한 의혹이 그러하고, 브라질 아마존 일대와 베트남 맹그로브숲 일대 등에서 비슷한 문제가 끊이지 않고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몰래 불을 놓고 황폐해진 땅을 싸게 매입하여 목적에 맞게 개발하는 일이 지난 수십 년 간 세계 각지에서 공공연히 이뤄졌다. 맹그로브숲이 사라진 자리엔 새우 양식장이 생기고, 아마존엔 닭이며 소를 키우는 농장이 들어선다.
그러고 보면 한국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데 한 가지 이유가 된 수종 단일화, 즉 소나무 중심의 조림 문제 또한 버섯을 키우고 나무를 파는 업체들의 이익, 곧 자본주의의 문제와 떨어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옥죄는가.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폐허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불이 지나간 자리>가 묻는 진짜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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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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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이 돈 된다고? 소방관이 부동산 개발업체와 싸운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