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지난달 대한석탄공사 직원 전원이 해고됐다. 해고예지 통보를 받은 지 한 달 만이었다. 단기 고용된 계약직 직원들이 마무리 작업을 마치는 대로, 대한석탄공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철밥통 신의 직장이라 알려진 공공기관, 그것도 1950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1호 공공기관의 최후가 이토록 초라하다.
대한석탄공사의 폐업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석탄을 생산하고 가공해 판매하는 것, 이것이 75년을 이어온 공사의 핵심 사업이었다. 석탄은 지난 시대 한국 산업과 경제를 떠받친 핵심 에너지였다. 멀리 서아시아에서 들여와야 하는 석유와 달리 자체 생산할 수 있는 에너지 자원으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유일한 믿을 구석으로 평가됐다. 제조업 기반 국가에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에너지 자원은 국가의 근간이 되니, 따로 공기업을 설립해 그를 관리하고자 한 거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에너지 정책 또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국내 석탄생산은 더는 시장성이 없다. 석탄 매장량이 적고 채굴비용이 비싸서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그뿐만은 아니다. 기후위기가 목전에 다다르며 전 세계 산업이 재생에너지며 친환경에너지 쪽으로 재편되고 있어서다.
석유시대의 끝... AI는 어떻게 바라볼까
그저 장려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유럽연합(EU)은 2026년부터 수입품 탄소 배출량이 기준치를 초과하면 벌과금을 물리는 탄소국경조정제도를 시행하기로 확정했다. 에너지 부문에서는 이미 메탄 배출량 측정과 보고, 벌과금 관련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트럼프 집권 뒤 미국에선 다소 차질이 있으나, 장기적으로 미국에서도 외국 제품의 친환경 기준을 강제할 것이 시간문제로 보인다. 에너지 부문은 물론이고 제조업 등 산업 전반에서 탈석탄은 시대적 과제가 된 지 오래다.
대한석탄공사 산하 9개의 광업소가 하나하나 폐쇄되고 마침내 공사까지 해체된 건 그래서 상징적이다. 전 국민적으로 소비했던 석탄 수요가 꾸준히 줄어들었고, 그나마 남은 발전소 등에선 수입품에 비해 생산단가가 턱없이 높기까지 했다. 공사 부채만도 2조 원이 넘어 사업을 이어갈수록 손실이란 분석이 이어졌다. 변화하는 시대에서 석탄, 그것도 국내 석탄의 존재가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제22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 소개된 작품 가운데 < AI 대담: 석유 시대의 끝 >이 있다. 포르투갈 창작자 바스칼 몬테이로의 작품으로, 창작극에서 다큐멘터리로 그 활동영역을 넓히려는 그의 새로운 시도다. 그저 평범한 다큐가 아니란 점도 주목할 만하다. 러닝타임 16분의 짧은 다큐는 그 설정부터가 다분히 실험적이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AI와 석유라는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이는 두 가지 요소가 기묘한 접합을 이룬다. 말하자면 다가올 시대의 주역이 될 AI 기술과 지난 시대를 떠받쳐 온 석유라는 화석연료의 조합이 그 자체로 상징적으로 교차한다는 뜻이겠다.
▲AI 대담: 석유 시대의 끝스틸컷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반세기 가동돼 온 포르투갈 정유소가 멈췄다
원제는 'The Closing of a Refinery', 직역하면 '정유소 폐쇄' 쯤이 되겠다. 말 그대로 포르투갈 북부에 위치했던 대규모 정유소가 문을 닫는 모습이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된다. 이를 들여와 소개하며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측은 제목을 'AI 대담: 석유 시대의 끝'이라 고쳐 달았다. 그저 한 정유소의 폐쇄를 넘어 '석유 시대'가 종말을 맞았음을 확인 또는 염원한다는 뜻이겠다. 또 하나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AI'와 '대담'을 한다는 사실 또한 강조하고 있는데, 한 주제를 두고 마주 앉아 진지하게 지성으로 교류하는 대담의 상대로써 AI가 인간 창작자의 상대가 된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다 봐야 옳겠다.
영화는 정유소의 폐쇄를 두고 창작자인 감독 몬테이로가 생성형 AI인 챗GPT와 나눈 대화를 비춘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토지뉴스 정유소(Refinaria de Matosinhos)의 모습 위로, 감독이 질문하고 챗GPT가 답하는 일련의 대화가 자막과 목소리로 이어진다. 정유소가 문을 닫은 상황을 두고 그 이유와 앞으로의 상황 등에 대한 자유로운 대화다.
정유소란 원유를 가공하여 정제하고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곳을 말한다. 항공유, 휘발유, 등유, 경유 등 산업현장과 생활에서 쓰이는 석유제품을 정제하는 걸 기본으로 하는데, 에너지 수급과 관리가 국가의 기간산업이란 측면에서 주요하게 취급된다. 한국에선 SK에너지,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OIL가 대표적 정유사인데, 그저 내수 제품을 생산할 뿐 아니라 고도로 정제된 제품을 수출하는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AI 대담: 석유 시대의 끝스틸컷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멈춰선 공장,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
마토지뉴스 정유소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에너지 기업 갈프(Galp) 소유의 정유소로 약 반 세기 동안 기능했다. 최대 11만 배럴 처리능력을 갖춘 마토지뉴스는 운영을 시작할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 최대 수준의 규모를 자랑했다. 포르투갈에선 역시 갈프의 시네스 정유소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공장이었을 정도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의 경쟁은 치열했고 변화는 빨랐다. 단일 공장 기준 SK에너지가 84만 배럴, GS칼텍스가 78만 배럴, S-OIL이 66만 배럴을 처리할 수 있단 점을 돌아보면 마토지뉴스의 설비는 국제적 경쟁력에서 뒤떨어졌다 볼 수밖에 없다. 갈수록 더 대규모, 첨단화가 되어가는 에너지 소비시장에서 마토지뉴스의 경쟁력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결정타는 코로나19였다. 팬데믹이 전 세계 경제를 멈춰 세웠단 건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비 또한 큰 규모로 줄였다. 물동량이 급감했고, 공장도 멈춰 섰다. 자연히 정유의 수요 또한 줄어들 밖에 없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수익성이 악화되고 EU 등 세계적으로 화석에너지에 대한 규제까지 강화되는 상황에서 갈프는 공장가동을 중단키로 했다. 마토지뉴스는 그저 저장과 유통을 위한 기능만을 유지하고, 정제는 더 크고 첨단 설비를 가진 시네스에서 전담키로 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마토지뉴스가 맞이한 변화다.
갈프의 결정이 포르투갈 사람들에겐 남다르게 다가왔을 터다.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정유소와 업체가 영업을 중단하고 축소하기까지, 그 아래 자리한 환경 변화를 몬테이로 또한 눈여겨보았다. 그는 챗GPT에게 이 정유소의 역할과 정유소가 환경에 끼친 영향, 갈프의 향후 계획, 석유에너지 산업의 미래 등과 관련한 질문을 연이어 던진다. 챗GPT는 우리가 일상 가운데 활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질문에 응답한다. 때로는 원론적이고, 때로는 폐부를 찌르며, 또 때로는 정확성이 떨어지거나 궤변에 가까운 주장들이 일거리를 잃은 작업자들이 오가는 공장 모습 위로 오간다.
▲AI 대담: 석유 시대의 끝스틸컷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밀려오는 변화, 인간의 대처는?
감독 몬테이로의 질문들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정유업을 비롯해 산업 전반, 자본주의와 시대변화에 대해 깊이 있는 수준의 식견을 갖고 있지 못해 서다. 그 밑천의 한계가 역력하게 드러나고 질문 또한 원론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기획의 참신성 이상의 깊이로 파고들지 못한단 점이 실망스럽다. 챗GPT의 답변은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대화를 이끄는 이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인데, 정유소의 폐쇄란 특별한 사건 속에서 그를 넘어서는 대담으로 이끌지 못하는 한계가 AI가 아닌 사람 탓에 빚어진단 사실이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실험적 측면에서 <AI 대담: 석유 시대의 끝>엔 분명한 의미가 자리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몬테이로의 원론적 질문이며 챗GPT의 평이한 응답을 너머 저만의 독자적 사고를 펼쳐볼 수 있는 것이다. 정유소의 폐쇄를 인상적으로 잡아내는 데 더해, 음향을 통해 불편함을 자아내고 의식을 깨우는 연출의 도움을 받아서 관객은 그 스스로 몬테이로의 질문에 진지하게 응답하게 된다. AI가 충실히 고려하지 못하는 인간의 감정과 태생적 한계, 즉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지 못해 도태된 인간의 자리를 영화를 보는 관객은 남다르게 이해할 수 있겠다. 그는 그대로 챗GPT가 갖지 못한 역량이고 시선이 된다.
영화는 저무는 한 시대를 가리킨다. 석유시대라 명명된 그 시대는 유라시아 대륙 서편 끝에선 마토지뉴스 정유소의 사업 중단으로, 동편 끝에선 대한석탄공사의 해체작업으로 종식을 본격화했다. 변화하는 시대를 인류 문명은, 국가와 사회, 개인들은 어떻게 마주하고 있나. 시대의 흐름을 타고 더 나은 길을 모색하는가, 급류에 휩쓸리듯 표류할 뿐인가.
<AI 대담: 석유 시대의 끝>은 우리가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시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대로 좋은가를 묻도록 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도록 이끈다. 한 편의 짤막한 다큐로써 이만하면 합격이 아닌가.
▲서울국제환경영화제포스터서울국제환경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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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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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세기 가동된 공장이 멈춰섰다... 석유시대 이대로 끝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