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이>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이처럼 엄마에게 일어난 사소한 사건은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왔던 그의 삶을 다른 각도로 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무직인 남편을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하고, 가정을 돌보느라 자신만을 시간이라고는 따로 쓸 줄도 모르며 지나온 시간들. 그렇게 자신이 펼쳐 놓은 시간 위에서 다른 가족들은 각자가 좋아하는 일들을 영위해 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새삼 말이다. 자신부터가 그렇다.
오랜 시간 그렇게 살다 보니 새로운 취미 안에서도 그는 그동안 살아온 방식 그대로, 자신의 작은 성취 앞에서도 가족을 제일 먼저 떠올리고 만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받을 수 없이 주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어떻게 항상 행복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순이의 모습을 조금 더 확장하자면, 이는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 속에서 여성과 엄마라는 존재가 감내해야 했던 의무와 책임이 결합된 그릇된 형태의 정체성과도 닮아 있다.
극 중에는 또 다른 여성이 하나 더 조명된다. 순이가 등록한 강좌에서 실버 바리스타를 꿈꾸며 먼저 수업을 듣고 있던 일순(전소현 분)이다. 처음 들어와 다소 어색하고 조심스러워하는 순이와 달리, 실버 바리스타가 되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며 선뜻 도움의 손길을 건네오는 인물로 상반된 자리에 서 있다. 여기에서 다르다는 뜻은 태생부터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먼저 나아간 존재의 변화된 모습에 가깝다. 그 역시 오래된 사회 구조 속에서 가정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여성이었고, 매일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도 먹고 사는 일이 바빠 바리스타라는 직업은 꿈도 꿔본 적이 없었다. 지금 순이가 겪고 있는 과정을 먼저 지나왔을 뿐이고, 새로운 삶 속에서 당당히 자신의 꿈을 일으켜가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시간 사이의 거리가 두 인물이 가진 모습의 차이를 이끌어냈다.
04.
"꿈이 뭐예요?"
영화의 후반부에서도 순이는 같은 모습으로 자신이 처음으로 성공한 라테아트를 찻잔 그대로 들고 집으로 향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사진으로 찍어 보내도 될 텐데 가족들에게 직접 보여주겠다고 그 고생을 사서 한다. 물론 이번에도 가족들은 냉담하다. 심지어 딸의 책상 위에는 인근 커피전문점의 일회용 컵이 가득 쌓여 있다. 한 잔의 라테아트를 완성하기 위해서 아내이자 엄마인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을지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순이가 어떤 관계 속에서 엄마의 자리를 지켜왔는지.
수많은 작품에서 깊이를 더해가는 오민애 배우의 연기는 이번 작품에서도 돋보인다. 짧은 시간 속에 한 인물의 서사를 담아내야 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감정 속에는 깊은 울림이 존재한다. 미세한 표정 변화, 말끝을 흐리는 인물의 습관, 상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부족한 자신감과 불안. 이 모든 것이 순이라는 한 인물의 내면을 완성하고 고스란히 전달해 낸다. 그녀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섬세한 감정선과 캐릭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문화센터에서 수업을 등록하는 신에서 미래에 대한 작은 기대로 환하게 웃던 모습이 내게는 오래 잊히지 않는다.
05.
이제 순이는 애지중지하며 찻잔째로 들고 온 라테를 마시며 식탁 앞에 앉아 그동안 미뤄왔던 자신의 바리스타 이름을 채우기 시작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그의 진짜 삶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어디에서든 '순이'가 될 수 있다. 잊혀져 가는 이름, 미뤄둔 꿈, 너무 늦었다고 포기했던 어떤 시작들. 그런 모든 것들 앞에서 영화 <순이>는 말한다. 지금도 괜찮다고. 지금이라서 오히려 더 좋은 거라고.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순이(Soon, i)다. 온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순이> 스틸컷인디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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