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가면> 스틸
㈜엣나인필름
하지만 기준의 부모님 뜻대로 모든 게 굴러가진 않는다. 자식을 위한 본인들의 영리한 선택은 계획대로라면 만사형통이다. 의심받지 않고 동네 이웃들에게 신임을 얻은 데다, 우리 아들만큼 공부도 잘하고 만능인 아이가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 시간만 흐르면 목표는 달성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인 기준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꿈에도 생각도 해보지 못한 돌발상황이다.
기준은 자기 나름대로 현지화 전략을 수행한다. 자기 재주와 능력이면 능히 이 무지렁이들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자신에게 부족한 게 조금 있긴 하다. 압도적 권능과 무력행사 여부다. 마침 최적의 조합을 찾아냈다. 몇 살 위인 영준의 형 영문이 바로 그 대상이다. 자신은 갖고 있지 못한 위험한 기운을 물씬 풍기는 영문에게 매혹되며 기준은 무의식 중에 영문처럼 되고자 한다. 과도한 욕심이다.
영문과 영준 형제는 천애고아다. 부모 없이 사는 미성년자 형제는 원래라면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서로 의지하며 헤쳐온 형제는 강제로 결별해야 한다. 영문은 동생을 책임지며 공공 지원의 경계 밖에서 자립해야 한다. 그가 행하는 선을 오락가락하는 일탈은 그런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기준에겐 그런 전후사정은 관심 바깥일 뿐이다. 오직 외형상 드러나는 부분만 취하고 싶다. 그런 욕망은 선을 넘지 않던 용문의 작은 영역을 위태롭게 하기에 충분했다.
기준과 용문의 관계는 관객이 보는 시선, 그리고 각자가 겪은 경험에 따라 다양한 단면으로 인식될 법하다. 기준은 자신에게 금지된 것, 혹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을 용문에게서 보았다. 자신의 부모님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식,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궤에서 기준 역시 어떤 착취를 죄의식 없이 행한다. 그러나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유소년 연령대 아이들에게선 한 줄로 단언하기 힘든 모호한 속내가 조성된다.
기준의 어머니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들이 연거푸 발생하고, 본인 선에서 수습하고 해결하려던 노력은 허사로 끝난다. 아이들의 은밀한 세계는 그 바깥에서 들여다볼 수 없는 격렬함과 그들만의 비밀로 가득 차 있다. 그 낯선 세계 앞에서 어른들은 변죽을 울리거나 번지수 한참 엉뚱하게 오판할 따름이다. 어른들은 진실의 표면도 긁어보지 못한다.
그런 어머니가 자식이 어떤 상황인 줄도 모르고 흔해빠진 레퍼토리, '우리 애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타령을 늘어놓을 때 자식은 어떻게 반응할까? 영화 속 장면은 무척 흥미로운 동시에 어떤 저항 또는 전복적인 기운을 퍼뜨린다. 세상만사는 아무리 어른들이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짜 놓더라도 그대로만 굴러가지 않는다. 그 단순한 진리를 무시한 대가는 고스란히 당사자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다.
우리가 만든 세상을 천천히 돌아보게 하는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 스틸㈜엣나인필름
영화는 완벽히 동떨어진 부모 세대와 자라나는 청소년 사이의 간극을 구획하고, 뒤를 이어 오직 또래 집단 내에서만 온전히 조망 가능한 복잡하고 불투명한 역학 관계를 정교하게 구현한다. 전형적이다 못해 복사해 붙인 듯 피상적인 설정에 지친 이들에게 <여름이 지나가면>이 선보이는 파격적 전복은 상당한 충격과 함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과 같은 후유증을 남길 만하다.
좀 방임해도 될 텐데, 자식의 세속적 성공, 곧 부모가 바라는 틀 안에 자식을 가두려는 욕망은 과잉을 초월하는 터라 자식의 올바른 성장을 오히려 저해한다. 정반대로 시골에 방치된 채 마치 '야생의 아이들'처럼 소외된 이들은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으로 편입될 기회를 연거푸 놓친 채 유기된 상태다. 이 극적인 대비와 그들이 뜻하지 않게 부대끼는 상황 형성은 그들 서로에게 공히 파괴적 효과로 돌아온다. 물론 내 탓이오 하며 책임질 어른은 어디에도 없다.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감독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맥북이면 다 되지요>의 성공 이후 장병기 감독은 코믹한 단면에 가려진 본인의 주제의식과 지향을 드러내고자 오랜 시간 분투해 왔다. <할머니의 외출>과 <미스터 장>, 본격 장편 <여름이 지나가면>에 이르기까지 이 변방의 감독은 유행에 영합할 생각 따위는 일도 없이, 오직 세상의 모순과 일그러진 광경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화면에 구현하는 데 전력으로 임했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그 노력의 1단계 완성태라 하겠다.
요즘 양산형으로 쏟아지는 일본 청춘물의 번안 형태 복제&현세에 강림한 지옥도 자체인 극단적 학원폭력의 선정적 전시 가운데 속하지 않고 오직 홀로 우뚝 선 이 영화는 기성세대가 만든 서늘한 사각지대를 실감 넘치게 구축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교육열은 순수한 학구열이 아닌 계급 재생산의 경로로만 의미를 지닌다. 영화 속 아이들의 만남과 이별은 그 거역할 수 없는 과정의 고착화를 상징한다. 그 결과물은 개운한 카타르시스 해소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잊기 힘든 마무리 도로 씬처럼 하염없이 내달린다.
근래 보기 드문 성취에 도달한 청소년 집단 묘사에 멈추지 않고, 지역 격차와 계급 갈등까지 나아가는 내공이 상당한 작업이다. 지독하게 현실에 천착하되 그저 소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인의 작가적 태도를 숨김 없이 정공법으로 드러낸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은 올해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을 장편 데뷔작 중 하나가 될 것이 틀림없다.
<작품정보>
여름이 지나가면
When This Summer is Over
2024|한국|드라마
2025.07.09. 개봉|115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장병기
출연 이재준, 최현진, 최우록, 정준, 고서희, 강길우
제작 ㈜스튜디오하이파이브, 와일드마일즈
배급 ㈜엣나인필름
2024 24회 전북독립영화제 옹골진상(대상)
2024 50회 서울독립영화제 넥스트링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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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